홍승재, 모험과 동경

단편소설집 "서정의 해상도" 미리보기

by 유인도

그날 이후, 나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단은. 너의 부재는 나의 발을 옥죄어, 아무리 허우적대도 기어이 그 자리에 붙잡아 두었다. 시간도, 공간도, 사람도, 내가 필사적으로 사랑했던 모든 것이 나를 두고 앞서갔다. 멀어지는 모든 것을 그저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 일은 상당한 고역이었으나, 그 슬픔의 무게가 피로로 변해버릴 만큼 나는 이미 무뎌진 지 오래였다.

단은아, 너와 함께 살아오며 사랑한 나날이 나의 전부였기에, 네가 사라진 지금, 나에게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 찬 입김이 잠시 허공으로 희미하게 흩어졌다가 금세 사라진다. 매일 저녁 미래에 대한 꿈을 꾸며 너와 이야기를 나눈, 그 상가 옥상 테라스에 여전히 나는 서 있다. 다만 부푼 꿈도 지향점도 없이, 하늘 아래 점처럼 작아 보이는 사람들만을 멍하니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응당 어떤 방향으로든 자의적인 전진을 뜻할 터인데, 나는 기꺼이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이대로 흘러가다 어느 벼랑 끝에 닿으리라. 어떻게든 되겠지. 혹은,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다시 너를 잃던 겨울이다. 일 년이면 네가 기어이 돌아와 내 품에 안기리라 믿었는데, 녹아든 상처에 찬 바람뿐이다. 지금 느껴지는 공기의 향과 촉감은 네가 사라진 그 눈 내리던 날과 다르지 않다. 시간은 어느덧 늦은 저녁을 향해 흘러 있었다. 더이상 점으로 보이는 사람 하나 없이, 정지된 풍경만이 눈앞에 걸렸다. 흥미가 떨어져 재미없는 발걸음을 나는 집으로 돌렸다.

텅 빈 방. 그곳은 첫사랑의 상식 대신 불쾌함과 공허함이 감도는 곳이었다. 일말의 온기도 없어 신경이 곤두섰다.

‘춥다.’

나는 몇 없는 겨울옷을 꺼내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검은색 패딩 한 벌과 블루종 하나, 그리고 발마칸 코트. 그것은 삼 년 전, 단은이 내게 준 수많은 선물 중 하나였다.

그녀는 고등학교 방송부에서 만났다. 나의 눈빛과 표정이 진중하여 좋다던 아이였다. 전자기기 다루는 일에 능숙하여 방송부에 들어간 나와는 달리, 그녀는 무언가를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다만, 기기 조작만큼은 홀로 아무것도 못 해내어서 늘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매번 같은 부탁이었지만, 그때마다 달라지는 단은의 눈빛과 표정이 아직 내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 캠코더 조작법을 한 번 알려주면 신이 나서 금세 2GB SD카드 하나를 다 써 와, 내게 찍은 것을 보여주곤 했다. 영상은 그녀의 시선 그대로를 담고 있었다. 그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단은의 시선과 마음이 어렴풋이 이해되어 묘한 몰입이 되었다. 방과 후 조그만 창틈으로 바람이 불어와 퉁퉁 소리를 내며 블라인드가 흔들리던 아무도 없는 어두운 교실, 잔디 운동장을 겅중거리며 뛰노는 까치, 오후 다섯 시 노란 태양이 오묘한 광채를 스민 국화꽃, 그리고 방송실 마이크로 장난을 치던 내 모습 전부. 단순한 사실을 넘어 그 이상의 의미가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그래, 방송실. 여러 선생님과 두루 친하게 지내었던 나였으니, 일 층 창고 옆의 방송실은 내가 관리자였고 그래서 편히 이용할 수 있었다. 나와 단은을 제외한 부원들 대다수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나 교내 행사와 같은 공식 방송 일정을 제외하고는 활동하지 않는 유령 회원이었으므로, 그 공간은 자연스레 나와 단은만의 아지트가 되었다. 나는 나만의 공간이 있어 좋아했고, 그녀는 캠코더와 내가 있어 좋아했다. 수업을 모두 마친 끝난 오후 네 시, 창살에 은은하게 빛이 튕기던 방송실의 전경이 그립다. 부서져 들어오는 빛살에 드러나던 먼지와,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 웃던 그 좁은 공간이.

오랜만에 꺼낸 발마칸 코트의 어깨선에는 먼지가 쌓여있었다. 재채기와 함께, 일순간 낮은 바람이 방 안을 휘저었다.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 뒤로 쪽지 한 장이 보였다. 길가에서 받는 전단지는 습관적으로 쪽지로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곤 했기에, 일 년간 방치했으리라 짐작했다. 다만, 유광 재질의 종이가 아닌 평범한 용지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쪽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펼쳐보았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이 너무나 생생하여 오히려 불안했다.


단초, 간직, 순수.

그곳으로 와줘.


각짐 없이 둥근 글씨와 ‘ㄹ’의 끝부분만 길게 올라가는 필체. 너무나 다정한, 분명 단은의 글씨였다. 너는 일 년 만에 나에게 이렇게 현현하는구나. 도무지 찾을 수 없던 너의 흔적이, 네가 선물한 발마칸 코트 주머니에서 나왔다. 대체 언제부터?

나는 단은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진 모든 옷의 주머니를 광인처럼 뒤졌다. 허탈한 희망으로 계속해서 찾았지만, 단은의 흔적은 발마칸 코트 속 쪽지 하나. 겨우 그거 하나였다. 내가 이것을 너무 뒤늦게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겨울이 되었기에 단은이 내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인지. 두통이 머리를 짓눌렀다. 쪽지 속 문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든 말에 의미와 다정함을 담아두었던 그녀였기에, 이 쪽지가 단순한 장난일 리 없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함을 요청하는 글이다.

나는 쪽지 속 글이 어떤 지시를 담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단은과의 기억을 다시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팔 년간의 긴 추억은 ‘행복함’이란 세 글자로 환원되어 뭉뚱그려져, 내 기억을 뒤섞어 놓았다. 음성이든, 영상이든, 글이든 그 모든 걸 소중하게 여겼던 단은이라면 달랐을까. 그 순간, 날카로운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우리의 추억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곳, 진청고등학교 방송실. 나는 그녀가 내게 그곳으로 오라고 손짓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단은아, 그래. 너는 아직 살아 나에게 너의 발자취를 남겨주는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부름에 기꺼이 응해 너를 뒤쫓는 것뿐이다. 늘 내 곁에 나란히 있던 너였으나, 이번만은 내가 너의 뒷모습을 좇아야겠다. 늘 너를 동경하던 나였기에. 너를 찾기 위한 이 여정을, 나는 이제 시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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