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파리는 시간 여행에 대한 판타지만 있을까? 그렇지 않다. 감독 우디 앨런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의외로 다양하다. 그리고 서사적이다. 그중 하나는 예술성이다. 관객을 파리 예술의 절정 시대, 1920년대로 데리고 간다.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피카소 등 유명 예술가들을 만나서 그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 길을 통해 예술에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한다.
감독이 말하는 것은 주인공 길이 관객이고, 관객이 곧 길이다. 길에 모습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실제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 그리고 그것을 깨달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 감정에 힘을 실지 않는다. 자연스럽다. 영화 속 은은한 색채처럼 감상하는 동안 피로감이 없다. 그리고 메시지는 간결하다.
주인공 길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가 입고 있는 옷처럼 흔하고 편안하다. 반면 약혼녀 이네즈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낭만은 있지만, 둘은 다르다. 가끔 민낯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네즈를 바라보면 얼굴이 찌푸려지고, 피로감이 생긴다. 끝에 다다르면,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길이 행동하는 모습은 분명 잘못된 방향이다.(사랑에 한정해서) 그런데 나쁜 사람은 이네즈가 된다. 이유가 무엇일까?
둘 다 잘못은 저지르지만, 방향성에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길은 잘못된 행동 속, 과거와 현재 삶 속에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성장하지만, 이네즈는 잘못된 행동 속에 과거, 현재 삶에 머무르게 된다. 옳은 방향에 대한 거름이 될 수 있는 실수가 아니라, 쾌락만 존재하는 욕망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길은 분명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서로가 맞지 않는 삶을 산다면, 각자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알려주고 있다. 사랑, 예술 그리고 시간이다.
삶을 살아갈 때, 길처럼 과거와 현재 속에 살아간다. 과거 파리를 방문할 때, 길은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에 꿈을 가졌다. 다시 파리를 찾은 현재는 소설가를 꿈꾸고 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 현재 속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네즈는 그가 쓴 소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재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 삶을 버리려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둘은 과거, 현재 속에 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각자 다른 현재를 살기 때문이다.
우연히 1920년대 시간여행을 하게 된 길은 소설가 피츠제럴드와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작가, 헤밍웨이를 만난다. 그런데 둘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다르다. 시니컬하게 대답하는 헤밍웨이와 다르게 피츠제럴드는 길을 친절하게 대한다. 그런 피츠제럴드를 그는 무례하게 대한다.(라이벌 헤밍웨이 작품만 칭찬한다) 아마도 피츠제럴드가 자신처럼 과거, 현재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길은 시간 여행에서 잠시나마 사랑했던 아드리아나와 함께 18세기 말에 도착한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에드가 드가, 폴 고갱을 만나게 되고, 서로가 다른 황금시대를 알게 된다. 아드리아나가 생각하는 과거, 길이 생각하는 과거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과거를 집착한 자신에 모습을 깨닫는다. 과거를 생각할수록 더욱 과거에 집착하고, 현재를 도피하게 된다. 현재와 과거는 다른 것이 없다. 결국 현재를 깨닫고, 미래를 향해 뛰어가는 것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임을 명쾌하게 깨달은 듯 보인다.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게 되면서 생각은 명확해진다. 바람을 핀 이네즈와 단호한 이별을 하고, 정처 없이 파리 시내를 걷는다. 그리고 운명적인 여자를 만난다. 불완전한 사랑을 가지고 파리에 온 길은 예술에 중요성을 느끼고, 시간에 답을 깨닫는다. 그 결과, 운명은 비 오는 파리와 함께 완전한 여자를 안겨주고 영화는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