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대한 설명부터 붙이자면 이영은 나의 필명이고, 소연은 원래 이름이다. 첫 번째 책은 유소연으로 냈고, 두 번째 책은 유이영으로 냈다. 세 번째 책은 모르겠다.
두 번째 책이 인쇄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필명을 쓸지 말지 갈팡질팡했다. 회사 일부터 이사, 출간 준비까지 겹쳐 진지하게 고민할 만한 짬이 안 나 책 계약할 때 쓰겠다고 했던 필명 그대로 책을 내게 됐다. 필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시점에는 나름의 이유가 차고 넘쳤는데 지금은 그게 굳이 필요한가 싶어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영이냐 소연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먼저 필명의 뜻을 묻는 이가 많았다. 내게 모국어를 심어준 엄마의 성 '이'씨를 넣은 것 말고는 특별히 의도한 뜻은 없다. 이응이 많이 들어간 '유이영'이라는 어감이 좋았다. '유이/영'인지 '유/이영'인지도 정하지 않았다. 다만 대개 '이영 작가님'이라고 부르길래 거기에 말을 덧대지는 않고 있다. 또 여성 작가임이 명확해보이는 이름으로 짓고 싶었다. 200년 전 여성이 작가로 활동하기 위해 여성성을 감춘 이름을 썼다면(이를테면 브론테 자매는 일부러 남성적 어감을 가진 이름을 필명으로 썼다), 2021년 대한민국에서는 말하고 쓰는 여성이 더 많이 보여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유이영이라는 이름은 10년 전 한 기억에서 끌어왔다.
"한 오십 살쯤 되면 책을 내보고 싶어요. 미리 필명을 생각해봤는데 유이영을 써볼까 하고요."
내 삶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스쳐가는 이에게 건넨 말이었다. 그 뒤로 이 필명을 입에 담은 적은 없었는데, 그때 그 말을 떠올리며 오십 살보다는 더 이른 시기에 작가로서의 나를 스스로에게 증명해보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때의 나는 왠지 실명으로 내 책을 내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다는 이유로 필명을 생각했다. 막상 지금은 필명 뒤에 숨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필명일지라도 독자가 찾고자 한다면 내 신상 정보는 거의 투명하게 다 공개돼있다).
지난해 말 '제8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 소식을 들으며 필명에 사로잡혔다. 글쓰기는 내 직장이 될 테다. 집필 노동을 하는 유소연이 있고, 나의 직장은 유이영이다.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해왔던 기사 집필과 내 글쓰기를 분리해보고도 싶었다. 대개 기자들이 책을 내면 기자로서의 정체성이 더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작가로서의 구분된 정체성을 필명으로서 내보이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문학적 자아를 구축해갈 상징적 계기를 주고 싶었다. 존경하는 한 작가님이 자신의 본명은 너무 세상에 의해 오염되었다며 필명을 쓰는 것을 추천한다고 했던 말도 떠올렸다.
약간의 기대가 반영된 이유로는 언젠가는 '문단의 아이유'가 되고 싶었다(이 문장을 쓰며 민망해서 이모티콘이라도 붙이고 싶다). 이슬아 작가는 어떻게 이름도 이슬아일까. 정이현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은 계기는 이름이 눈에 들어와서였다. 평범하고 무난한 내 이름으로는 어떤 상품성을 가지기 힘들다고도 생각했다. 독자에게 기억되기에 내 이름은 어떤 신비함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정이현 작가를 비롯해 많은 알려진 작가들이 실은 필명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묘한 배신감이 들면서도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필명을 쓰는 많은 이유들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건 그저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더 잘 쓰고 싶어서. 필명을 쓰면 사회적 자아를 내려놓고 보다 투명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니 이미 원고를 다 완성한 후에 필명을 폐기할까 고민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른 것이다. 원고를 넘기고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기간부터 원래의 이름을 계속 돌아보기 시작했다.
필명은 글쓰지 않으면 죽는 이름이다. 소연이는 내가 책을 내지 않아도 일도 하고 가만히 있어도 최소한 연차라도 쌓아가지만 이영이는 그렇지 않다. 필명을 쓰니 다음 책을 내고자 하는 조급함이 자꾸만 커진다. 같은 맥락에서 커리어가 분산되는 문제가 있다. 신문기자라는 커리어와 작가 커리어는 상호 보완하는데 둘의 경계를 나누는 일이 쉽지 않아 보인다. 필명으로 쓴 내 글에도 직업인으로서의 관점이 묻어있고, 기자로서의 커리어에는 나의 출간작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둘의 이름은 다르다니. 또 나를 누군가가 '소연'이라고 부른다면 반드시 그 어투에는 애정이 묻어있다. 그런 사랑을 독자에게서도 받고 싶어서 '유소연'으로 글 쓰고 싶은 마음이 다시 올라온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에서 필명쓰기가 시작됐듯, 역시 글쓰기로 말미암마 필명을 버리는 쪽도 생각해본다. 필명이 곧 익명이나 가명을 뜻하지는 않지만, 본래 이름으로 썼을 때 작가의 용기가 더 돋보이는 순간이 있다. 친족성폭력 경험을 고발한 책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를 쓴 은수연(필명) 작가는 실명 김영서로 다시 같은 책을 냈다.
나는 답을 알고 있다. 소연이냐 이영이냐 혼란스러운 이유는 아직 덜 썼기 때문이다. 실명으로 아등바등 살아온 내 삶이 작가로서 권위를 얻는 데 쓰였으면 하는 욕심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커리어를 리셋하고 무명(지금의 필명)에서부터 시작해 오로지 글로써 승부보고 싶은 패기도 있다. 쓰면 쓸수록 어느 방향으로 갈지 명확해질 것이다. 그때도 정해지지 않는다면 에밀 아자르(필명) 혹은 로맹 가리(그의 본명)처럼 둘 다 쓰면 된다. 필명을 쓰는 자리에서 '안녕하세요. 저자 유소연입니다'라고 말하는 실수만 안 하면 된다(필명으로 책 내놓고 북토크 때 인사를 이렇게 해버린 적이 있다). 고작 한 권만 필명을 썼기에 이를 계속 이어나가도 좋고 언제든 나의 본래 이름으로 되돌아와도 된다. 아직 내 마음의 지침은 실명과 필명 사이에서 흔들리지만 가능성이 열려있는 지금의 상태도 썩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