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하세요?”라는 질문을 오랜만에 들었다. “밥이야 늘 스스로 지어먹죠. 요즘에는 바빠서 잘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또 다른 버전으로는 “인간은 누구나 제 손으로 밥 지어 먹는 존재죠”, “아뇨. 취사는 안 하고 매식하는 편입니다” 등이 있다. 하지만 나는 사회적 인간이므로 “네. 동생과 같이 살아요” 정도로 답한다. 그 질문이 유독 거슬리는 날엔 “네. 독립해 살고 있어요” 정도로 정정해준다. 누군가 자취(自炊)라는 단어를 쓰면 괜스레 심통 부리고 싶다. 나는 이 단어에 노이로제 수준으로 반응한다.
시간은 죽 거슬러 올라가 김칫국 콸콸 들이켜던 남자들에서부터 시작한다. 때는 바야흐로 20대 중반, 구구구구구... 썸남과 취중진담이 오가던 순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 입장에서는 여자친구가 자취하면 좋은 면이 많지. 사실 모텔비 부담도 만만치 않거든. 같이 편하게 쉴 수도 있고.”
지금이었다면 “내가 네 모텔비 아껴주려고 뼈 빠지게 벌어서 월세 내는 줄 아냐? 내 돈인데 왜 네가 설레니? 그리고 누가 너 우리 집에 들인대? 김칫국 좀 작작 마셔라”고 쏘아 붙였겠지만 그땐 그저 찝찝한 기분을 품은 채 집에 들어갔다. 그날 밤 나는 문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던 그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했다. 그 대화로 인한 불쾌함이 취기 못지 않게 끓어 올랐고, 밑바닥에는 경계심도 적지 않이 깔려 있었다.
썸남까지 가지 않더라도 물어보지도 않은 소개팅 자리를 건네며 “야, 자취한다니까 너도 나도 손 들더라” 같은 요상한 말을 굳이 전하는 이가 있었다. 그저 일로 만난 사이일 뿐인데 내가 혼자 산다고 하자 “오~~ 자아취이이이이~~~!!!” 하면서 물개박수를 치던 이도 떠오른다. “자취하는 여자가 이상형”이라는 말이 농담으로 공공연히 쓰이고, 개그 프로그램에선 미녀(?!) 개그우먼이 “저 자취하고 잘 취해요”라는 멘트를 날린다(장담컨대 남자가 쓴 대본일 게다). 술집 갔더니 벽면에 “너는 자취했을 때가 제일 예뻐”라는 네온사인이 붙어있길래 술맛 팍 떨어진 날이 있다. (다시 보니 “너는 취했을 때가 제일 예뻐”였다. 이러나저러나 술맛 버리긴 매한가지다).
자고로 자취하는 여자란 공력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침대-그것도 내 침대!-로 데려갈 수 있는 대상이란 말인가. 1차적으로 불쾌한 지점이 여기 있다. 문제는 별다른 흑심 없이 물어오는 “자취하세요?”가 왜 자꾸 맴도는가이다.
질문자의 의도는 부모님과 같이 사느냐, 혹은 고향을 떠나 타지 생활을 하느냐일 테다. 그렇다면 자취란 무엇인가.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 자취인가? 그런데 왜 신혼부부에겐 자취라는 말을 안 쓰나? 타지 생활하는 게 자취라면 10년 넘게 서울 살았으면 됐지 몇 년을 더 살아야 자취가 아닌가? 한 30년 살면 ‘비자취인’ 증명서라도 나오나?
사전적 의미로 돌아가 손수 밥 지어먹으면, 즉 밥상 차려줄 이 없으면 자취인가?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우리새끼>에 나오는, 반 백 살 다 돼서도 엄마 없이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연예인을 보면 그럴 듯도 하다. 그러면 내 입에 삼시세끼 극진히 차려 바치는 나한테 왜 자꾸 자취하느냐고 묻느냐는 말이다. 혼자 사는데 쿠쿠 한 번 안 울리는 집은 자취인가 아닌가?
단순하게 모든 1인가구는 자취한다고 봐야하는 건가? 나는 동거인이 있는데 왠지 자취하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해야할 것 같다. 아니면 월세살이, 전세살이 하면 자취인가? 질문자가 자가 여부를 궁금해 하는 것 같진 않으니 이 답도 아니다.
결국 자취와 비(非)자취를 나누는 명확한 기준은 찾지 못했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비자취인이 되는 방법은 남편을 만드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다른 수가 있으면 알려주시라). 보호해줄 가부장이 없어서 어딘가 비어 보인다는 인식이 “자취하세요?”라는 말에 내포된 게 아닌가 의심한다. 세간의 인식에 발맞추자면 반대로 남성 1인가구는 밥 차려주고 돌봐줄 아내가 생겨야 비로소 자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남자가 자취하면 짠하고, 여자가 자취하면 쉬워 보인다는 이미지가 생겼겠는가. “남자가 자취하면 남자가 꼬이고, 여자가 자취해도 남자가 꼬인다” 같은 말에서도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취는 ‘결혼 전 임시로 거쳐 가는 허점 있는 생활’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자취는 삶의 중요한 나사 하나가 빠진 미완성의 생활양식이라는 어감을 풍긴다. 자취인(人)보다는 자취생(生)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유다. 제아무리 의식주 스스로 해결한다는 자부를 갖고 살아도 자취라는 말 속에서는 독립된 존재로 대우받기 어렵다. 그래서 스물 남짓에는 그럭저럭 수긍할 수 있었던 그 말이 지금은 꽤 듣기가 거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