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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영 Aug 29. 2021

나는 왜 못 쓰는가

쓰기 싫은 날의 변명

요즘 글쓰고 싶게 하는 마음을 남에게 자주 퍼준다. 가끔 열리는 온라인 북토크에서 '내 얘기를 쓰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쓰기 전부터 방어적으로 굴면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직장 다니면서 글쓰기가 쉽지 않다' 등과 같은 글쓰기 고민을 듣는다. 며칠 전엔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잘 없어서 고민'이라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내가 글을 쓰는 시점과 독자가 반응하는 시점 사이에 시차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 내면의 해방을 위해, 나를 제1 독자로 두고 써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청중에게 자주 쓰는 부사는 '일단'이다.


일단 일기라도 먼저 써보세요. 글쓰기만큼은 양이 질을 반드시 담보합니다. 나에게 글쓰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주는 거예요. 마감을 만들고 같이 쓰는 동료 집단을 꾸려보세요. 자발적으로 글 쓰고 싶게 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도 좋아요. 저는 양질의 에세이를 읽을 때 그런 마음이 올라오는 편이에요. 일단 스스로를 책상 앞에 앉혀야 합니다. 글쓰기는 오로지 나를 통해서만 발전할 수 있어요.


답을 는 나는 내가 봐도 성의있고 열정적이다. 쓰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귀하게 싹튼 것인지를 알기에 내가 알고 있는 노하우를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려 문제를 함께 해결해보려 한다. 북토크가 끝나면 진이 쪽 빠져서 '공짜로는 못 해먹겠네' 싶다가도 누군가가 글쓰기 SOS를 치면 또 열심히 A/S를 해주고 있다.


탈출구를 찾은 듯한 표정으로 돌아간 청중이 그날 밤 자신의 SNS나 브런치에 글을 올린 걸 볼 때 뭉클함이 그 진빠지는 일을 계속 하게 만든다. 한편 나는 강렬한 공허감에 빠진다. 방금 전까지 '일단 써보라'고 확신에 차 말한 내 모습과, 한 달 넘도록 브런치 발행은커녕 일기 한 자 쓰지 않는 내 현실과의 괴리를 느낄 때마다 내상을 입는다. 

 

글쓰기가 고통스러워서, 아니 쓰지 않기 때문에 글쓰기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것이 너무 짜증나서 눈물이 차오른다. 이제까지 나를 쓰게 하는 힘에 대해서 그렇게 역설했던 내가, 나를 못 쓰게 하는 이 고약한 힘은 왜 잡아내지 못하는 것일까. 그래서 호의로 퍼준 나의 마음까지도 탓하게 된다. 글쓰라는 마음을 퍼줄수록 내 안의 창작욕이 메말라 가는 게 아닌지 말이다.


나는 왜 못 쓰는가. 범인을 찾아보자. 첫번째 용의자는 번아웃이다. 올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매일 두어 건씩 잡히는 기사에 책 원고까지 일주일에 족히 200자 원고지 60~70매 가량을 써냈다. 마감이 끌어온 힘이다. 그동안은 기사 쓰느라 내 글을 못 쓰겠다는 핑계라도 있었는데, 요즘은 업무량이 줄었음에도 기사는 물론 내 글도 쓰기 싫다. 거지같은 언론중재법이라고 쓰고 언론탄압이라고 읽는다 뉴스를 보고 있자면 환멸이 들어 본업도 하기 싫어지고 억지로라도 쓰는 글에서조차 멀어지니까 아예 노트북 앞에 앉는 게 어색한 몸이 되어버렸다.


둘째, 이게 다 책이 안 팔려서이다. 출간 후 독자들의 반응은 감동적이었지만 이번  수명이 좀 더 길었으면 했다. 기대보다 낮은 판매고를 보며 세상에는 잘 하고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개뿔 인정이 안 돼 힘들다. 인세 부자가 되는 상상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다음 책을 쓸 확실한 동력, 즉 더 많은 독자를 얻고 싶었다. 읽는 독자님 돈 아깝게는 안 해드릴 텐데 하는 자신감이 무색하게 애초에 책이 팔리지 않는다. 사람들 신문도 책도 사보지 않은 지 오래다. 래도 그와중에 선택받은 책들이 있던데 적어도 내 저서가 그런 행운을 입지 못한 건 자명해보인다. 그 좌절감이 생각보다 잘 회복되지 않아 우울증 문턱까지 다다르고 있다.


물론 출간과 글쓰기는 밀접하면서도 별개이다. 책 내지 않아도 글쓰는 행위 자체가 주는 해방감이 있다. 하지만 '독자의 맛'을 한 번 본 이상에야 그 전으로 돌아가기 힘들다.  무엇보다 글로 돈을 벌어야, 즉 원고료를 받거나 책을 팔아야 프로작가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어떻게 팔리지 않작가들은 이 가성비 떨어지는 책 작업을 계속 할 수 있는걸까. 내 안의 인정 욕구는 채우지도 못했는데 실패의 경험을 딛고 자기의 서사를 쌓아올리는 을 어떤 계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마지막 꽤 멋있는 변명이다. 쓰고 싶은데 도무지 나오지 않는 어떤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한 신열을 앓고 있다고, 훗날 대작을 쓰고 나서 회상하리라. 완전한 뻥은 아니다. 쓰고자 하는 마음을 오랫동안 품고 있었지만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이 고여 있다. 겉핥기로 안전한 것들만 쓰고자 하니 그 기만적인 마음을 스스로 모를 리가 없다(나에게 때리는 팩폭이 너무 아프다). 아무 말도 못 하겠다는 건 절실하게 하고픈 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젠가 쓰겠지 하고 덮어둔 내면의 소리들을 더 오래 묻어둘 수 없어 괴롭다.  

 

이러한 이유들이 얽혀 모든 글쓰기가 숙제로 다가온다. 매주 한 번 있는 쓰기 모임도 그토록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로 구성돼 있고 다녀오면 99%의 확률로 치유되는 기분이 들지만 발전적 해체를 해야하는 때가 아닌가 혼자서 수백 번 고민하다가 또 기계적으로 다음 모임 약속을 잡는다. 나 따위 기다리는 독자가 어딨느냐며 브런치도 한 달 넘게 방치해 놓다가도 가끔 울리는 '구독'과 '댓글' 알림 빚쟁이 독촉으로 들린다.


스스로에게 쓰고자 하는 마음을 길러주기 위한 몸부림은 눈물겨울 정도이다. 무기력증과 비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면 쓰고 싶어지지 않을까 해 운전과 골프도 시작하려 한다. 당분간 최소한의 기사 말고 아무것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해버리면 쓰고 싶은 마음이 마법처럼 되살아나지 않을까도 생각해봤다. 그동안 읽고 쓰는 데 매달려 있던 일상을 조금 풀어주고, 삶을 음미하고 감탄하며 영감을 축적할 때라는 합리화도 곧잘 한다.

 

그래서 이 글의 끝이 '나는 이렇게 쓰고 싶은 마음을 회복했어요'가 되었으면 좋겠지만 딱히 그런 비책은 찾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 쓰기 싫은 슬픔과 자괴를 그러모아 쓰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못 쓰겠다면서도 '나는 왜 못 쓰는가'를 주제로는 최소 10회는 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격렬하게 쓰기 싫은 마음에 압도되다못해 끝내 그 몹쓸 마음을 파헤쳐 활자로 옮기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생기는 아이러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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