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책상 앞으로 퇴근한다. 하루종일 책상 앞에서 일해도 집에 있는 내 책상 앞에 앉을 생각을 하면 설렌다. 책상에 꿀이라도 발라놨나 싶겠지만 그저 가로 120cm, 세로 80cm짜리 평범한 원목 책상일 뿐이다. 책상 위에는 고등학생 때부터 쓴 키티 스탠드와 형광펜 두 자루, 읽다 만 책 수 권과 독서대 정도만 놓여있다.
언제부턴가 뇌가 팝콘처럼 튀겨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다 보면 10초 만에 생각이 여기서 저기로 마구 나뒹군다. 본 것도 들은 것도 많은데 정작 나에게 쌓이는 것 하나 없다는 자각을 한 지 오래였으나 마땅히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쇼츠를 ‘무한 스크롤’ 하다보면 퇴근하고 자기 전까지 서너 시간이 증발한다. 이 시간을 그러모으면 인생 하나가 덤으로 생길지도 모른다.
어느 날 우연히 저녁을 먹은 후 소파에 눕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랜만에 고마운 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썼다. 책도 조금 읽고, 중간에 스마트폰으로 장도 보고, 모바일뱅킹에서 연 4%짜리 예금도 하나 들었다. 두 시간 동안 대여섯 가지 일들을 왔다갔다 했지만 스마트폰에서 정처없이 재밌는 걸 찾아 헤매는 일보다야 훨씬 나았다. 실로 오랜만에 경험한 몰입감이었다. 머릿속 번잡한 일들이 절로 씻겨나갔다.
12월 내내 송년회는 최소로 참석하고 이렇게 책상 앞으로 ‘퇴근’했다. 지난 한 달간 이 책상 앞에서 나를 새로 만났다. 창조의 기운을 충전하고 완전히 무언가에 빠져드는 시간이야말로 정말로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심지어 인터넷 쇼핑을 하더라도 책상 앞에서 하면 딱 그 일만 마치고 말게 된다. 앉아서 뭐든지 하다보면 어느새 손으로 무언가를 끼적이는 행위로 나아간다.
이 책상 앞에만 앉으면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어떤 작업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알아차리는 마법이 일어난다. 한쪽에 메모장을 두고 생각나는 일들을 죽 적어가다보면 5~10분이면 끝낼 일들을 괜히 전자기기를 켰다가 딴길로 새는 바람에 미뤄왔다는 진실도 깨닫는다. 이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 나는 내 삶의 조각들을 맞추어 나간다.
나는 직장인들은 하루 한 시간은 이렇게 책상 앞에서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한다고 믿게 됐다. 다행히도 직장인들의 카톡은 오후 6시가 되면 신데렐라처럼 뚝 끊긴다. 그러니 고요하게 주어진 이 시간을 즐기지 않는 게 손해 아닌가. 이게 사회 풍조가 되면 우리 사회의 반(反)지성주의도 조금 수그러들지 않을까. 취향은 풍요로워지고 사람들의 성정이 대체로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책상 혁명’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하는 공상도 책상 앞에서 해본다).
책상 앞에 앉아 자격증을 공부하고 외국어를 공부하라는 게 아니다. 그건 다소 한국적이다. 생각하는 사람의 최소한의 물적 조건은 책상이다. 너비 120X80cm짜리 이 공간만 허락된다면 어디서든 나의 자아를 굳건히 지킬 수 있다. 팝콘처럼 튀겨지던 나의 뇌도 비로소 묵직해진 느낌이 든다. 몰입하는 자아, 그게 바로 내가 나의 책상에 발라놓은 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