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녀 클럽

“그들은 국가와 가정의 대들보이다”

by 유이영


오래 전부터 ‘장녀 클럽’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구상이 있었다. 재작년쯤 맏딸들을 모으다가 엎어진 적이 있다. (대단히 장녀적 이유였다. 가족이 아팠다.) 한창 가족 내에서의 역할에 치여 힘들 때 장녀라는 정체성이 만든 내 안의 강점을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찾아보자는 일회성 프로젝트였다. 본격적으로 날짜를 정하기도 전에 신청자들이 몰려서 놀랐다. 그로부터 1~2년 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맏딸들이 ‘K장녀’라는 무릎 탁 치게 만드는 조어를 세상에 내놓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통쾌했던지.


세계에 많고 많은 장녀 중에서도 나이값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 커 온 장녀가 가지는 상징성을 드러내기에 ‘K’만큼 적절한 접두사도 없다. 삼남매인 집은 높은 확률로 성별이 ‘딸-딸-아들’이라는 기이한 패턴, 고질적인 남아선호사상, ‘맏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산업화 시대의 낡은 인식이 겹치며 그냥 ‘장녀’로는 설명이 부족한 한국적 장녀가 탄생한다. 내 세대에 태어난 K장녀는 가족에게 억울하고 서운했던 강렬한 기억 몇 개쯤은 품고 살아가는 듯하다. 동시에 그들은 부모의 전폭적인 믿음을 한 몸에 받으며 대개는 엇나가지 않고 성장한다. 부모의 기대에 맞춰 진학하고 그에 걸맞은 직업을 가지며 잘 살아내는 것처럼 보이다가 인생의 어느 국면에서 센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맞는 이들을 종종 보았다.


최근 나를 포함한 K장녀 일곱 명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놀랍도록 비슷한 성장 배경에 동질감을 느꼈다. 나만 듣고 자란 줄 알았는데 모두가 들었던 말들이 쏟아졌는데 몇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는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믿음에 관한 아래와 같은 말들.


“너는 알아서 잘 하잖아. 쟤(동생)는 뭘 모르잖니.”

“네가 잘 돼야 동생들도 잘 되는 거야.”


가족에게 실패의 경험을 말하기가 두렵다는 K장녀들. 이들은 자기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싶어하는 욕구는 크지만, 혼자 해내는 데 익숙해져서 선뜻 도움받기를 어려워한다. 알아서 잘 하는 것도 결국 나의 자원인데 가족들에게 쉽게 이를 내주었던 습성을 버리기가 영 어색하다.


둘째는 가족의 해결사, 중재자, 혹은 엄마의 대리 남편이 되면서 내면화하는 죄책감이다. 부모의 불화, 가정의 경제 사정 같은, 아이로서 알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너무 일찍 알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특히 장녀들에게 엄마라는 존재감은 우주와 같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엄마의 ‘감정받이’ 역할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엄마가 너 아니면 누구에게 얘기하니” 같은 말은 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고나서까지 듣는 단골 멘트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은 곳을 여행할 때 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우리 엄마는 이거 못 해봤는데’라는 생각으로 튀기 십상이다.


남동생을 둔 장녀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고충은 따로 떼서 연구해도 좋을 만큼 상징적이다. 엄마만큼이나 장녀들에게 큰 존재는 남동생이다.


한 장녀는 어려서 축구화를 신고 다녔다고 한다. 부모님이 남동생에게 물려줄 것을 생각해 처음부터 남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신발을 첫째 딸에게 신긴 것이다. 남자 아이 신발을 신은 장녀도, 누나 것을 물려받은 남동생도 양쪽 모두 만족할 수 없는 소비인 셈이다. 부모님 보험금 수익자가 남동생으로 되어있다, 남동생은 엄마 카드로 생활하는데 나는 스무 살때부터 알바몬으로 살았다, 부모님이 “집은 아들 물려줘야지”라는 말을 달고 산다, 자기몫은 남동생 집 사주는 데 들어갈 게 분명하니 결혼 자금 모으려고 악착같이 일했고 실제로 결혼할 때 한푼도 부모 지원을 받지 못했다, 늦둥이 남동생 대학은 네가 보내야지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눈물 바다를 건너고 공감의 터널을 지나며 나와 비슷한 길을 겪어온 다른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조금 덜 외로워진 우리는 치유의 숲으로 들어갔다. 사람을 어떤 역할에 묶어두는 것만큼 마음 쪼그라들게 하는 일이 없다. 우리 일곱은 장녀 껍질을 벗어던지자는 결의로 만남을 마무리했다. 장녀로서 길러진 나의 많은 자질들을 인정하고 화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누군가가 “케이 장녀는 국가와 가정의 대들보”라고 하자 폭소가 터졌다. “케이 장녀를 건들지 말라”는 시쳇말은 장녀들의 좋은 자질을 암묵적으로 우리 사회가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립심, 리더십, 책임감 같은 역량이 첫째로 태어난 아이에게서 두드러진다는 연구도 수두룩하다.


다른 이는 어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너도 처음이니까 다 잘해낼 필요 없어. 못 해도 괜찮아. 너를 보는 동생도 시행착오할 기회를 줘야하지 않겠니.” 꼭 내게 해주는 말처럼 들려서 그 말을 오래 마음에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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