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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 Jul 11. 2023

직장 내 부고 메일과 일하는 삶이 남기는 이야기

작은 이야기 2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쏟아지는 업무 메일 속에 숨어드는 꺼림칙한 존재가 있다. 기호로 표현된 검은 리본을 말머리에 달고,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서신. 부고 메일이다. 근무 인원이 많은 대기업에 다닐 경우, 이 건물 언젠가의 복도에서 스치거나 회의실에서 언쟁을 벌였을 누군가가 상을 당했음을 하루 5건 내외로 알게 된다. 이제는 상을 당한 이의 이름과 부서를 확인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연차가 되었지만, 여전히 거기에 떠 있는 이름이 전혀 모르는 이의 것일 때 나도 모르게 약간은 안도한다. 모르는 이가 겪은 죽음과 이별은 그와 나의 거리감만큼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제나 가장 긴장하게 하고,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하게 하고, 하루를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직장에서 받는 본인상 부고 메일이다.


지금까지 이 회사에서 일하는 5년 넘는 시간 동안 그런 날이 세 번 있었다. 이름만 아는 이도 있었고, 꽤 가까웠던 이도 있었다. 견디기 어렵지만, 견디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일들. 내내 있던 누군가가 아주 사라져도, 많은 것들은 똑같이 돌아간다. 업무가 줄어들지 않고 기한이 늘어나지 않는다. 동료들은 무심코 농담을 하고,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삶의 시간, 회사의 시간이 계속된다. 시간의 틈바구니에 끼어 돌아가다가, 다시 메일함에서 검은 리본과 마주치고 가슴이 철렁하기를 반복하면서 생각하고 만다. 언젠가는, 이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 삶이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부고 메일이 알리는 동료의 빈자리는 그 어떤 죽음보다도 사무실의 우리에게 동일시된다.

죽음은 우리 모두가 맞게 될 결말이고 인간을 유한한 존재로 만드는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래서 죽음은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회사에서 경험하는 죽음은, 회사를 다니는 삶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 회사를 다니는 삶.


'오늘 죽는다면 무슨 일을 하겠어?'


이 질문은 죽기 직전 무얼 하면 가장 후회가 안 남을까 하는 고민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물음에 가까울 듯하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 날이라면 출근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 오늘 내가 죽고, 지금까지의 시간들로 내가 기억된다면, 여기까지의 삶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면 그것에 만족하는가. 언젠가 갑자기 시간의 흐름이 끊기고 기록이 여기서 멈춘다 해도 괜찮은 날들을 살고 있는가. 답해야 하는 것은 이런 질문들에 가깝다.

회사를 다니는 삶인 나는 늘 이에 대한 대답이 궁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 보람 있게 사는 사람들,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 또는 그냥 무탈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죽어도 이 정도면 열심히 잘살았어 툭툭 털고 하직할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고민에 대한 대답이 궁한 이들이 고민을 하기 마련이다.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철학을 기웃거리고, 월급생활에 뜻을 품지 못한 이들이 월급생활자의 윤리와 의미를 파고든다. 회사를 다니는 삶이 풍요로운 이들은 저런 질문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집착하는 쪽이다.

이 회사를 다니다가 죽고 싶지 않다. 귀신이 되어 인사팀장의 사무실을 떠돌며 보이지 않는 사직서를 날려댈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 회사가 아닌 다른 어디에서 삶을 보내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내 삶이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나. 내내 그런 것을 고민했다. 자기의 것이 아닌 회사에서, 딱히 근사한 커리어가 될 것 같지 않은 일을 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 이가 그런 삶의 당위와 방향에 대해 방황하는 그런 날들을 보냈다.


그러다 얼마 전, 이슬아 작가의 이웃 어른 인터뷰집 <새 마음으로>를 읽으며 무게를 조금 덜었고, 동시에 새로운 무게를 졌다. 거기에는 사회와 언론의 인정과 주목을 받지 않는 일을 몇십 년째 묵묵히 해온 사람들이, 그 특유의 아우라와 함께 등장했다. 생활인으로서, 직업인으로서, 살아온 격변의 세월과 손에 익은 노동의 시간을 갑옷처럼 두른 채.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위로받았던 것은 하루하루 스스로와 일에 충실하게 살아온 끝에 쌓이는 시간의 위력으로 너무나 특별한 사람이 된 어른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정말로 힘 있고 대단해서, 내 마음까지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

한편으로 그 이야기들에 더 마음이 묵직해졌던 것은 나는 그렇게 단단한 아우라를 가질 만한 어른이 되고 있는가 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만큼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가, 스스로의 일에 떳떳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가. 지금까지 회사를 다니는 나를 괴롭히던 질문은, 내가 성공하거나 어떤 결과를 남기고 좋은 커리어를 쌓을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생각이 미친 것은 좋은 이야기를 남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이다. 오늘 여기에서 기록이 멈춘다고 해도,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 좋은 이야기가 되도록 하자. 이 인터뷰집의 어른들처럼 빛나는 이야기들.

마흔에 파이어족이 된 사람과 서른에 자기 브랜드를 낸 사람의 성공 신화, 줄을 서서 지나가는 샤넬과 벤츠의 행진, 그 모든 것들이 가능해진 단군 이래 가장 돈 벌기 쉽다는 대한민국에서, 눈이 팽팽 돌아가고 머리가 띵해지는 이 욕망의 폭주기관차에서, 그저 회사를 다니고 있는 하루하루. 그리고 그 매일들의 끝에, 조금씩 적립해 온 월급생활자의 연금과도 같은 이야기들. 그 어떤 이야기도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믿는다. 삶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모두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걸 믿는다. 그리고 믿음으로써 다시 삶은 의미를 갖는다. 결국 언제나 남는 것은 이야기가 아닐까. 내가 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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