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이야기 3
연차에 비해 부서를 많이 옮겨다닌 편이다. 자의로 옮긴 적이 여러 번이나, 작년 연말에는 부서가 속한 조직이 강제로 옮겨지는 일도 겪었다. 그 일을 겪을 때는, 그게 마지막일 거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전혀 다른 성격의 조직에 어떻게든 적응하고자 애를 썼던 걸 보면. 하지만 일 년이 채 안 되어 같은 일을 다시 더 불안정한 방식으로 겪을 위기에 놓였고 역시 이번에도 이건 나의 의지나 노력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사내의 정치나 까마득히 높은 누군가의 의사결정에 따라, 임원진의 거취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부서가 폭파되거나 생성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흔하다고 겪는 사람의 당혹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커리어란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매체에서 다뤄지지만, 그렇게 커리어를 ‘관리’할 수 있는 건 사실 소수다. 그리고 이렇게 임원의 거취에 따라 조직원들의 커리어와 업무가 한순간에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고 해도 회사에서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그런 건 회사의 책임이 아니라는 걸, 이미 우리는 인정해 버렸다.
내가 겪은 두 번의 경우는, 드라마에 흔하게 나오는 흉흉한 소문조차 생략된 채 이동 직전에 통보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내 의견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었다. 부서원들은 난무하는 추측과 흥미로운 소문을 찾아 몰려드는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야’하는 표정들 속에서 걱정하고 긴장하고 모욕감을 느끼며 견뎌야 했다. 개인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극히 적거나 없었음에도, 혹시나 내가 지금 놓치고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바보같이 앉아만 있다 당하는 건 아닐까, 뭔가 행동해야 하나, 아니면 그런 행동은 역효과를 일으킬 뿐이니 가만히 있어야 하나를 고민하고 서로 눈치를 봐야 했다. 임원이나 인사에서는 우리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고 반영해줄 것을 약속했다가도 하루아침에 말을 바꿨다. 애초에 한두 명의 임원이나 인사 팀원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역시, 나와 부서원들의 대응은 각자도생 원칙에 따른 개인기 발휘로 귀결되고 있다. 각자 평소 알던 부서장을 찾아가거나, 개별 조직이동을 지원하는 잡포스팅 제도를 노리거나, 보다 전투적으로는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 마음의 병을 들먹여 부서를 바꾸거나, 하다못해 정보를 그러모으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살피는 방식으로라도. 나의 경우에 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여러 차례 부서를 바꾸거나 강제로 부서가 바뀌는 상황을 버텨왔기도 하다.
작년 연말에 뜻밖에 마케팅에서 데이터 분석의 세계로 내동댕이쳐졌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난생처음 들어보는 SQL을 공부하고 무려 SQLD 자격증도 따게 했다. 그리고 올해,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도 나의 반응은 체념 끝의 낙관이었다. 그래, 어쩌면 이건 위기가 아니라 기회일 수도 있어. 내가 덩그러니 데이터 분석에 남게 된다고 하면 이참에 데이터 분석 공부를 더 해보지 뭐. 나는 아직 주니어니까 이렇게 커리어를 더 발전시킬 수도 있어. 그리고 다시 마케팅으로 가게 된다 해도 또 잘 적응해 보면 돼. 괜찮아. 이럴수록 운동도 열심히 하고, 회사 밖에서의 삶도 챙기자. 유튜브랑 브런치도 더 열심히 하자. 그런 나의 낙관성과 긍정적인 마인드가 약간은 자랑스러웠을지도 모르고, 나쁜 상황을 나쁘다고 인식하고 싶지 않은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다시 인식한 것은, 이게 과연 개인기로, 나를 더 훈련하고 역량을 강화하여 어디에서도 잘 해낼 수 있는 인재로 만들어서 극복해야 할 일인가 하는 의문이다. 이렇게 회사가 조직원의 이익을 침해하고 제멋대로 굴 때, 우리는 집단행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개별적으로 맞서서는 넘어설 수 없는 대상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을 때, 같은 면에 앉은 서로를 의심하며 각자 살아남을 길을 모색하거나 더 나은 인재가 되어 문제 상황을 매번 홀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보다 나은 게 연대라는 것을 우리의 선배들이 보여주지 않았나.
커리어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재 한둘만 이 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정보와 추측과 눈치에 의존해 버터야 한다면, 나의 남은 회사 생활은 너무 길게만 느껴진다. 이 거대한 회사에서 스무 명 남짓한 부서원들의 연대는 너무나 작고 연약할 것이고, 바로 그렇기에 연대의 힘을 믿기 어려운 우리에게 스무 명은 뭉치기엔 너무 많은 숫자인 걸 알면서도. 이번에도 우리는 개인기로 이 상황을 헤쳐갈 것이고, 이런 일을 다시 겪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역량을 갈고 닦겠지만, 내가 택할 수 있는 것도 결국엔 그런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