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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un 18. 2019

오키나와에서 아이와 살아보기 #4

4. 언제라도 다시 올 것처럼, 어제도 왔던 것처럼

멈출 듯 느리게 가던 시간도 여행의 허리춤을 지나며 조금씩 속도를 내고 있었다.

멈출 듯 작은 보폭으로만 걷던 우리도 살짝 멀리 내다보고 싶어 졌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오키나와의 츄라우미 수족관에서 하루 두 번 무료로 돌고래 쇼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과 나 단둘이 온 여행이었다면 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돌고래를 볼 아이의 표정이 너무 궁금해졌다.

관심이 있을까? 신나 할까? 돌고래가 뭔지 알기나 할까? 꼬리의 꼬리를 무는 궁금함과 함께 우리는 츄라우미 수족관의 한쪽에 위치한 오키 짱 극장으로 향했다.

아이는 신나 하며 아직 한산한 관객석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나와 남편은 어디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일까? 이곳저곳 앉았다가, 옮겨 앉아보고, 허리를 굽혀 아이의 눈높이에서도 잘 보이는지 심사숙고 해 자리를 잡았다.

도무지 시작할 것 같지 않은 고요함을 하나 둘 깨고, 교복을 입은 일본 아이들의 조잘대는 말소리, 멀리서도 자동으로 고개를 향하게 하는 익숙한 모국어가 넓은 관객석에 뒤죽박죽 섞여 설렘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끼익-” 오래된 스피커의 녹을 씻어낼 듯 쨍한 소리와 함께, 경쾌한 음악이 터져 나왔다. 조련사들과 돌고래들이 익숙한 솜씨로 무대에 올랐다.


사실 돌고래쇼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땐, 오직 아이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돌고래들이 수조 안을 휘젓고, 조련사들의 손짓에 점프를 하고 음악에 맞추어 춤추는 모습에 아이보다 나와 남편이 더 신나 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보다 더 크게 “우아아아아!” 탄성을 외치며 새로 산 핸드폰의 슬로모션 기능으로 돌고래의 점프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에 질세라 나는 입을 헤 벌리고, 좋아하던 아이돌 공연이라도 보듯 넋을 잃은지 오래였다. 마지막 미세 전류 같은 제정신이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아이도 나름의 방법으로 돌고래 쇼를 즐겼다. 돌고래가 점프를 하면 자기도 점프를 하고 지느러미를 벌리고 서면 자기도 팔을 벌리고 서면서 누가 돌고래인지 관객인지 모를 놀이를 하고 있었다.

35세와 37세 그리고 25개월 셋 모두 돌고래 쇼 앞에서 똑같이 신났고, 똑같이 흥분하고 있었다.



점프하는 돌고래에 넋을 잃은 우리 셋을 바라보며,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언제나 공부 중인 아빠를 위해 집에서도 까치발을 들고 숨죽이며 걸어 다니고, 온 가족이 어딘가 멀리 여행을 가는 일은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엄청난 일이었던 어린 시절.

어린 시절 추억들을 되짚으며, 비슷한 기억을 찾아보려다 그만두었다.


비좁은 추억들 속에서 어린 나를 살짝 데려다가 지금의 나의 아이 옆에 아무도 모르게 앉혀 놓았다.


'나의 아이와, 어린 나' 둘은 돌고래의 몸짓 하나하나에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같은 추억을 만들어 가며, 어린아이 둘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35살의 나는 그 순간의 공기, 비릿한 바다의 냄새, 살갗에 닿는 바람의 온도... 내 몸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그 둘을 오래도록 기억하려 애썼다.


이날 이후,

'이런 건 애들이나 좋아하지' 싶었던 일들을 아이 핑계로 하나 둘 할 때마다 생각하게 된다.

아이를 낳고 키우고, 피곤한 일상을 쪼개 함께 추억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사실,

아이만을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능력 밖의 일들을 해내느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일상 속에서

오키나와에서의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일상이 순간순간 도피처가 되어준다.

딱히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거기에 있었던 시간이, 작은 우리만의 공간이, 우리가 나눴던 웃음이

힘든 일상을 비집고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들 사이를, 끝없는 일과 일 사이를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며 금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추억은 이렇게나 힘이 세다.


나의 아이에게도 다른 무엇보다, 이런 추억거리들을 많이많이 만들어주고 싶다.

우리와 함께한 추억들이 아이가 자라며 겪을 수많은 고민들 속을, 고단함들을 마구 방해했으면 좋겠다.


오키나와 여행 이후 우리는 버릇처럼 매일 새로운 여행을 꿈꾼다.


언제라도 다시 올 것 같은,

어제도 왔던 것 같은

익숙하고

느린 걸음을,

여행같지 않을 그 여행을.

 








여행을 계속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 계속 그리는 것.



오키나와 여행기를 읽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다음 여행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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