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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내가 해주는 위로

문득 사진 앨범을 보다가

by 유진

이럴 때가 있다. 매일 하던 루틴을 하기 싫고, 좋아하던 운동도 하기 싫고, 그냥 지금 무료한 감정에 빠져서 마음껏 스크롤을 내리며 비생산적인 시간에 잠식되고 싶을 때. 유튜브를 보다가, 인스타를 보다가, 다시 유튜브를 켜는 내가 지겹다가 ‘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 생각하며 이번엔 앨범을 눌러본다. 스크롤을 무작위로 위로 올려 한 지점에서 멈췄다.


2022년 오랫동안 발리에 가서 마음껏 자유롭게 여행하던 사진들이 보였다. 요가에 미쳐있었던 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요가를 하고 요가 철학을 공부하는 사진들도 있었다. 스크롤을 계속 내리다 보니 그런 시간도 끝이 나고 나는 서울로 돌아와 있다. 어느덧 가을이 된 서울을 만끽하고 있었다. 맞아 그랬었지. 당시 회사를 그만두고 백수였던 나는 남는 게 시간이었고 그 시간을 이용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려 했었다. 책도 많이 읽었는지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찍은 사진도 많았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더 확고히 다지려던 시간들이었던 게 기억이 난다. 스크롤을 더 내리다 보니 오랫동안 만났던 남자친구와 이별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때 감정이 또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으며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기웃거리던 시절들.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른다. 또 활짝 웃고 있는 내 사진이 보인다. 아 이때 좋았었지.


울고 웃고 기뻐하고 자유롭고 불안하고 실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시절들이 보였다. 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다가도 나는 어느새 무언가 확신에 차 새로운 도전 앞에서 설레어했다. 아무것도 재미가 없고 쳇바퀴 같이 굴러가던 일상을 지내다가도 나는 어느새 새로운 친구들과 파란 바다 앞에 누워 웃고 떠들고 있었다. 어떤 것도 영원한 건 없었고 한 시절 한 시절을 살며 그렇게 삶의 다양한 챕터들을 쌓아가는 게 보였다. 머무르고 바꾸고 잠시 뒤로 가고 또 옆으로 가기도 하면서. 지금의 나는 또 어떤 시간을 지나고 있는 건지, 앞으로 나는 어떤 날들을 살고 어떤 기억들을 저장해 나갈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쩐지 과거의 내 사진으로부터 과거의 나로부터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게 다 지겨웠던 마음도 조금씩 맑아지는 듯 했다.


스크롤을 조금 더 내리다 보니 그 해 겨울에 보았던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사진이 보였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떤 영화 평론가 분이 쓴 것 같은 글을 찍어놓은 사진이 있었다.


-그는 자기 삶을 직시하며 살아가고 있고 이제는 제법 평온하다. 그 얼굴 앞에서 '젊음'이라 썼다 지우고 '삶'으로 고쳐 쓴다. 가능과 불가능, 예측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선택하거나 포기하는 일, 그로 인한 결과의 불확실함은 젊음의 소유만이 아닌 까닭이다. 영화가 주는 삶에 대한 자각과 성찰, 생생한 에너지와 은근한 온기 앞에서 생각한다. 어느 정도는 흔들리고 또 얼마만큼은 의연해지면서, 그렇게 방향키를 움직여가며 살아가는 것이, 삶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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