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느끼기보다 해석하는 데 더 익숙하다. 어제만 해도 행복을 느끼는 순간, ‘이게 바로 세로토닌의 효과인가’ 같은 해석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괜찮으면 이유를 찾고, 불안하면 원인을 분석하고, 애매하면 이름을 붙이려 한다. 자동반사적으로 작동하는 내 마음의 메커니즘이다.
이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배운 태도에 가깝다. 어릴 적 ‘It’s not about the nail’이라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이마에 못이 박힌 여자가 머리가 아프다고 말하자, 남자는 못을 빼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여자는 그게 아니라 공감해달라고 말한다.
영상은 코미디였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나를 놀리는 것 같아서 모멸감을 느꼈다. 그 영상은 웃기기 위해 여자를 의도적으로 단순한 캐릭터로 만들어 두었고, 그런 단순화에는 편향된 시선이 묻기 마련이다. 댓글들도 그 영상을 그저 재미로 소비하지 않았다. 편향된 시선을 두고 공감하거나 비판하며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 편향의 끝이 내 쪽을 향해 있는 것 같았고 나는 그런 이미지로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 안의 메커니즘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기보다, 어떻게든 설명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형태로 가공하려 애썼다. 모든 감정에 원인을 붙이고, 이야기를 만들어 정리하려 했다.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감정이 날뛰는 순간에도 곧바로 쏟아내기보다 한 발 물러서서, 마치 남의 감정처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듣기 편해 보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It’s not about the nail’ 속 여자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감정을 가공하는 일이 나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거나 보듬어주지는 못했다. 이야기를 덧붙일수록 감정은 더 무거워졌고, 나는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하지 못했다. 감정은 원래 느껴지고,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가는 것인데 나는 그것을 이해하고 붙잡아 정리하려 했다.
감정을 가공하려면, 먼저 감정을 눌러야 한다. 한꺼번에 쏟아내는 대신 마치 바늘 구멍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처럼 작게 쪼개어 내보내야 한다. 그렇게 작은 빛 조각들을 연결해서 인과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찾고 나면 감정의 뿌리를 이해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건 이해가 아니라, 감정 위에 또 다른 감정을 덧씌운 것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그대로 두지 못하는 사람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