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나는 잠재력이 있다’라고 믿기 시작했는지, 그 믿음의 시작이 되는 구체적인 사건은 떠오르지 않는다.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어떤 결핍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핍이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키웠다. 이게 계기라면 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특별한 존재란 무엇이었을까. 돌이켜 보면 그것은 언제나 사회통념의 기준으로 인정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기준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내가 느끼는 결핍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학생이었을 때는 명문고나 명문대를 간 사람들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전문직에 있거나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 혹은 그럴듯한 명예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려나.
이렇게 보면 내가 바라보던 특별함은 어떤 고유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사회가 인정하는 기준을 내 안으로 가져와 만든 특별함의 이미지였다.
문제는 내가 그 기준 속에서 내 존재감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느낄 때였다. 그 순간 등장한 말이 바로 잠재력이었다. ‘사회통념상 특별한 존재’로는 지금 당장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 할 것 같으니 잠재력이라는 말로 그 상황을 회피하고 동시에 그 말로 나 자신을 보호했다.
‘나는 잠재력 있다.’는 믿음은 단순한 자기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꽤 정교한 심리적 방어 장치였다. 현재의 평가가 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떤 가능성이 나를 설명한다고 믿는 방식으로 잠재력이라는 개념은 현재의 나를 최종적인 평가에서 잠시 빼내 미래로 판단을 유예시켜 준다. 지금의 결과로 나를 판단하기는 괴로우니 미래의 나를 끌어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잠재력은 단순한 희망이나 위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것은 특별함의 서사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에 가까웠다. 잠재력은 지금은 특별하지 않을 수 있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라는 감각을 준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잠재력이라는 믿음이 있는 한 나는 완전히 평범한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현재의 성과와 나의 존재 사이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이라는 완충지대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잠재력은 단순히 실패를 견디게 해주는 개념이 아니라 특별함의 가능성을 계속 열어두는 개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믿음은 장기간 성과가 없게 되면 아주 미묘하게 형태를 바꾸기 시작하여 어느 순간 그것은 ‘잠재력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바뀐다. 지금까지 계속 끌어다 썼던 미래의 내 이미지가 이제는 현재 갚아야할 빚이 되어 '잠재력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절박함이 된 것이다.
이쯤 되면 잠재력에 대한 믿음은 존재의 근거가 된다. 나는 단순히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사람이 된다. 이때부터 잠재력은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니다. 정체성이다.
잠재력이 정체성이 되면 사람은 이상한 딜레마에 빠진다. 잠재력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증명되기 전까지는 언제나 안전하다. 하지만 동시에 증명되는 순간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잠재력을 지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너무 쉽게 실패하면 잠재력이라는 이야기가 무너질 수 있고 너무 평범한 선택을 하면 잠재력이라는 이미지가 흐려질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유예된 상태에 머문다. 가능성은 계속 유지되지만 현실은 계속 시작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점은 잠재력이라는 개념이 겉으로는 시스템 밖의 이야기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의 성과나 기준으로 평가되지 않는 어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잠재력은 사실 철저하게 시스템 내부의 개념이다. 왜냐하면 잠재력에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 기준에서 증명될 것이라는 전제와 지금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국은 그 경쟁 안에서 빛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재력은 시스템을 거부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나오는 개념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