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스트레스, 업무 스트레스, 그래도 가족을 위해 버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집에서 저녁을 먹는 날이면 항상 남편이 내게 묻는 말이 있다.
"여기서 행복해?"
그럼 나는 의례적이지만 즉시 "그럼, 행복하지."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남편은 나를 잠깐 바라보다가 옆에서 빨리 밥 먹고 놀아주라며 보채는 아이도 잠깐 바라보다가 "다행이다."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밥을 먹는다.
"자기랑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으면 난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나는 여기서 너무 힘들거든."
해외 주재원에 대한 환상이 유난히 큰 것 같다. 하긴, 나도 나오기 전엔 그랬으니까. 해외 생활에 대한 환상을 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외국인들과 외국어로 일하는 프로페셔널함, 높은 임금, 해외에서 외국어를 배우며 국제 학교를 다니는 아이의 밝고 명랑한 모습, 우아한 사모님 라이프. 음. 어디서부터 아니라고 말해야 하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환상은 환상일 뿐. 현실은 한국의 일상과 다를 바 없고 스트레스와 우울감과 끝없이 싸우는 날들의 연속이다.
하루는 남편이 친구들한테 힘들다는 이야기를 못 하겠다고 넌지시 말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친구 녀석들한테 처음에는 해외에서 일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다가 팔자 좋은 소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한국 연봉의 두 배 가까이 받고, 아이도 외국 경험하고, 와이프가 집에서 육아를 전담해주고, 돌아오면 승진도 따놓은 당상인 데다가 여기는 동남아니 주말에는 쉬면서 골프도 실컷 칠 거 아니냐고. 거기에 한국의 치열한 경쟁과 사내정치, 팍팍한 물가, 자식 교육 이야기가 버무려지면서 그래도 네가 부럽다, 라는 말로 귀결되는 단톡방에서 남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어깨를 토닥이며 "나도 그래, 나도 여기서 힘들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아. 사람들이 해외 생활에 대한 환상이 크더라고." 하고 남편을 위로해주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주재원으로 일하는 남편의 고충을 옆에서 지켜보면 다음과 같다. (남편의 말, 공공기관 등을 방문했을 때 필자가 느낀 점들을 바탕으로 쓴 글이라 다소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1. 타국의 문화/관습과 한국의 기업 문화를 동시에 조율하며 일해야 함
한국의 일하는 속도에 비해 인도네시아의 업무 속도는 상당히 느린 편이다. 하지만 현지의 업무 속도와 상관없이 한국 본사에서 원하는 속도에 맞춰 현지 업무를 진행해야 한다. 그래서 부족한 일들을 어떻게든 끼워 맞추는 역할은 파견된 주재원들의 몫이다. 쉽고 명확한 예로 라마단 기간을 들어보자.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로, 무슬림들의 연중 최대 행사인 라마단 기간 동안 엄격하게 금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새벽 5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물조차 마시지 못하니 일할 기운도 없다. 약 한 달간의 라마단 금식 기간 동안 사람들의 업무력이 무척 떨어지고, 현지인들은 당연히 라마단 기간에는 일을 덜 하거나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현지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한국에서 급한 일이 떨어지면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데 현지 직원들은 라마단 기간이라 못 한다고 불평불만이다! 그럼 불은 누가 끄나? 현지 파견 직원들이 끈다. 라마단이 끝나면 일주일 정도의 휴가가 주어지는데 이때 정말 아무도 일을 하지 않는다. 교통체증이 극심한 자카르타의 도로가 뻥뻥 뚫리는 걸 경험할 정도로 모두가 놀러 가는 시기이다. 이때 한국 회사에서 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바로 한국에서 파견된 주재원들이 해결한다. 현지 직원들에게 나오라고 하면 모독으로 받아들인다. 이렇듯 우리에겐 당연한 것들이 그들에겐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에게 당연하지 않은 것이 그들에겐 당연한 것일 수도 있고! (ex. 업무 시간 중에 기도하러 간다고 사라져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일하다가 속이 터지고 열불이 나도 참야아하고 끝없이 조율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남편을 보면 인내력이 늘어난 만큼 울화도 쌓인 것 같다. 언제 내면의 분노가 터질까 조마조마하다.
2. 생소한 외국어로 의사소통할 때의 답답함
만국 공용어인 영어를 공용어로 쓰거나 중국어, 일본어처럼 익숙한 제2외국어를 쓰는 곳이라면 조금 덜 할지 모르지만 인도네시아어처럼 생소한 제3외국어를 필수적으로 써야 하는 곳에서는 의사소통이 참 답답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외국어 하나 더 배워 좋지만, 언제나 영어/인니어 두 개 언어로 서류 작업을 해야 하고 현지 직원들도 영어가 능통하기보다는 의사소통이 되는 정도라 인니어를 구사하지 않으면 불편한 점이 많다. 인도네시아는 영어가 공용어가 아니기에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처럼 어디서든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인니어를 어느 정도 이상 구사해야 현지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훨씬 원활하다. 남편의 인니어가 3개월 만에 일취월장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3. 야근, 회식, 야근, 회식, 야근, 회식
현지 직원들의 일처리 속도가 느리고 그 작업 퀄리티가 한국과 비교할 수 없(게 낮)다 보니 마무리 작업에 언제나 많은 시간이 걸린다.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또 얼마나 일처리가 늦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강박적으로 서류를 검토하는데 그 몫은 온전히 한국 파견 직원들의 것이다. 자연스레 야근을 하게 된다. 거기다 회식은 어찌나 또 많은지! 타 기업 파견 주재원들 및 교민들과의 자리 등등등. 한국은 이제 회식이 굉장히 가벼워지고 있는 추세지만 여기서는 왜들 그리 술을 많이 드시는지 모르겠다. 회식 문화가 한국의 8~90년대에 머물러있다. 지난 1년 동안 남편이 마신 술이 남편이 입사하고 지금까지 마신 술보다 더 많은 것 같다.
4. 다른 나라 기후, 음식으로 인한 건강 문제
인도네시아는 개발도상국이고, 평균적인 위생관념은 한국의 80년대 수준인 듯하다. 게다가 기후도 덥고 수질/공기질도 깨끗하지 않아 항시 음식과 물을 조심해야 한다. 남편은 밖에서 절대 찬 음료를 마시지 않는데 깨끗하지 않은 얼음 때문에 지독한 배탈이 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음식도 꼭 데워 먹어야 위장의 편안을 지킬 수 있다. 외식도 꼭 큰 쇼핑몰이나 외국인들이 많이 가는 곳 혹은 한국 음식점만 간다. 또 외식도 처음 한 두 번이지, 사람의 입맛이란 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어서 3개월 정도 지나면 한국 음식을 찾게 된다. 안타깝게도 한국 음식점이 죄다 남쪽에 포진해있어서 한국 음식 사 먹기가 어렵다. 밖에서 대부분 끼니를 해결하는 남편은 입맛에 맞지 않는 식사 때문에 회사에서 컵라면을 달고 살았다.
근 1년간 남편 체중이 7kg 정도 줄었다. 딱히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하거나 식단을 조절한 적이 없는데. 말 그대로 힘들어서 빠진 거다. 홍삼, 비타민, 유산균을 보일 때마다 챙겨 먹이고 있고 주말에 가끔 운동 삼아 골프 치러 나가도 과도한 업무와 일정,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에는 장사가 없다. 지난주에는 골프 치러 갔다가 되려 몸살에 나서 앓아누웠다.
해외에서 돈을 많이 버는 건 그만한 대가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업무가 1이라면 외국에서의 업무는 2.5 이상인 듯하다. 업무량 자체가 다르다. 주재원 연봉이 세다고 하는데 지켜보니 일 한만큼 버는 것 같다. 퇴근 후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은 정말 가끔이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서 머리만 대면 코 골며 뻗을 정도로 피곤해한다.
누군가의 눈에는 동남아 주재원이라는 것이 그저 팔자 좋은 모습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이면의 고충과 노고가 무척 많다. 남편은 강박증과 편집증이 무척 심해졌다. 같은 일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소한 일에 종종 심하게 화를 내기도 하고 갑자기 화를 주체하지 못해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한 번은 삶이 불행하고 우울하다고 해서 진지하게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당신 몸 건강, 마음건강 생각해서 어서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자고 진심으로 말하니 아이가 이제 막 적응했는데 또 이동하면 아이에게 힘드니까 더 버텨보겠다고 하며 다시 일터로 나갔다. 안쓰럽고 또 안쓰러웠다.
주재원 와이프의 삶, 주재원 아이의 삶에도 각자의 고충이 있다. 와이프는 경력단절과 타지에서의 독박 육아, 남편과 아이의 스트레스와 감정 받이 역할 등으로 우울증을 겪는다. 감정 받이를 해야 하기에 본인의 외로움이나 스트레스를 누군가에게 표현할 수도 없다. 아이는 또 어떠한가.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 동떨어져 강제로 적응해야 하는 충격, 또래 친구들 없이 혼자 노는 외로움 등을 감내해야 한다. 모든 게 쉽지 않다. 좋아 보이는 이면에는 그만큼 잃는 것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환경을 위해 낯선 사람, 사회, 문화와 매일 고군분투하는 건 누가 뭐래도 주재원 본인인 남편이다. 남편의 고충을 알기에 주재원 가족의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 중 주재원 본인인 남편의 이야기를 먼저 쓴다. 남편의 노력을 잊지 말고 나도 더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되새긴다.
해외로 나오면 적어도 한국보단 덜 힘들고 가족 모두 조금 더 행복할 것이라는 건 환상이다. 하하호호 행복할 수 있는 건 가족들 각자 서로 그만큼 희생하고 배려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누구 하나가 일방적으로 베풀어서 만들어지는 행복이나 해외에 나왔다고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행복 같은 건 없다.
인도네시아에 와서 가족 간 불화가 줄어든 이유는 아마 서로가 포기하고 희생한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인지 때문일 것이다. 희생과 배려 없는 사랑과 행복이 어디 있겠나.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조금 더 힘내자고, 우리 남편 파이팅이라고 문자 하나 보내본다. 고마워 남편, 사랑해 남편, 힘내요 남편. 언제나 우리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거 너무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오늘도 조금만 더 힘내요.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