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좋게 분위기 좋은 카페를 2시간 이상 독점했다. 손님이 없는 덕에 카운터 알바분들의 취향이 십분 반영된 플레이리스트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는데, 잔잔한 멜로디의 인니 현지 팝이 예상외로 너무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렇게 음악을 감상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인니에 넘어오고 나서는 매일 집에서도 차에서도 아이 동요와 동화 CD만 틀어놓고 있었고, 아이 픽업 웨이팅을 하던 스타벅스와 제이코에서는 사람들의 수다 소리에 묻혀 배경음악 따윈 들을 수 없었다.
모처럼 귀에 그대로 꽂히는 음악을 감상하는 느낌은 낯설었다. 이런 멜로디는 한국 발라드 느낌인데 이래서 케이팝이 인기가 많은 건가? 인니 팝도 상당히 좋네, 무슨 가사인지 궁금하네, 하다가 이어폰 없이 외출하면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던 불과 1년 전이 생각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의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워 X맨, 마 X마 X)를 물려받아 H.O.T. 와 S.E.S. 앨범을 늘어질 때까지 들었던 것부터 길거리 음악 감상 인생을 시작했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카세트테이프, CD 플레이어, MP3 플레이어, 핸드폰으로 기기도 변하고 즐겨 듣는 음악도 꾸준히 변했다.
좋아하는 가수의 새로 나온 앨범 테이프를 사기 위해 몇 푼 안 되는 용돈을 꼬박꼬박 모았던 때가 있었다. 음반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챙겨주시던 포스터에 뛸 듯이 기뻐했었다. 달리면 CD 플레이어가 튕겨 버퍼링 걸리는 게 싫어서 버스를 놓쳐도 걸었던 때도 있었고, 고작 음악 파일 16개 들어가는 MP3에 어떤 음악을 넣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에야 오글거리지만 연애의 기쁨과 실연의 아픔을 배경음악에 담았던 싸이월드 미니홈피 시절도 있었다. 곧이어 무제한 스트리밍의 세상이 열렸고 나는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이 되었다.
더 이상 고심해서 음악을 듣기보단 추천 음악이나 누군가의 음악 앨범을 무작위로 재생하며 귀가 심심하지 않게 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 가사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던 시절은 음악이 유일한 힐링의 수단이었고 내가 겪어보지 못한 미래의 이벤트들을 잔뜩 상상하는 풋풋함이 있었지만, 흘러가는 멜로디만으로 족하던 시절은 회사생활이며 몇 푼 안 찍히는 급여와 빠듯한 한 달 가계부에 지친 어른이 있었다.
아이를 낳고 나선 집에선 동요나 동화 CD 외엔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도 지하철로 통근하며 회사 생활을 할 때에는 종종 음악 가사에 기운도 얻고, 위로도 받아 훌쩍거리거나, 경쾌한 멜로디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퇴근했던 때도 있었는데 왕복 4시간 광역버스 출퇴근이 시작되니 그 모든 게 끝났다. 버스에 앉으면 바로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깨어 있을 땐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를 보거나 지루한 시간을 빨리 보내기 위해 유튜브를 봤다. 어느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절실해져서 아무것도 듣지 않으며 걷는 데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스쳐가며 언뜻 본 어떤 기사에서 서른 살이 넘으면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취향이 고정되기 때문이라는 게 주 근거였지만 댓글에는 그런 거 신경 쓸 여유도 없고, 새로 나오는 아이돌 음악은 정신 사납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라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흘러가는 멜로디조차 피곤하다면 그만큼 삭막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 아닐까. 매일이 버거워 마음이 사막보다 황량한 시절엔 노래조차 들리지 않더라. 대학 시절에 클래식 음악 감상 동아리가 있었다. 음악이야 항상 감사하는 건데 무슨 동아리씩이나, 하며 지나갔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음악을 짬 내어 별도로 감상한다는 것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가능했던 나름 호화스러운 취미였다.
새로 데뷔한 아이돌이라면 무조건 듣고 봤었는데 BTS가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유명한 지도 인도네시아 와서야 알게 되었다. (토코피디아 모델이 BTS여서 깜짝 놀랐다) 이제는 옛날엔 답답하다고 듣지 않던 발라드가 듣기 좋은 걸 보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생전 처음 팬클럽 가입했던 보아(BoA*)는 어느덧 가요계 대선배가 되었고 그 시간만큼 나도 나이가 들었다. 최연소로 데뷔했던 그녀가 삼십 대 중반이 되었으니 흘러간 시간이 확 와 닿는다. 그녀는 가요계의 전설로 남을 것 같은데 나는 그동안 뭐했나 생각하니 헛웃음만 나온다. 보아는 알까. 그녀의 노래 Every heart(이누야샤 엔딩곡이었지*-_-*후후... 어린 시절 덕질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된다)가 인도네시아 어린이 체육교실(Rock****)에서 종종 흘러나온다는 걸. 물론 가장 많이 나오는 한국 노래는 블랙핑크와 BTS지만 어쨌든 내 10~20대를 온전히 같이 했던 가수의 그 시절 노래가 타지에서 생각지도 못한 장소와 순간에 나온다는 건 정말 신선한 충격이자 예상치 못한 기쁨이었다.
국내 스트리밍 서비스를 모두 해지하고 나와 애청했던 플레이리스트가 모두 사라졌다. 아쉬운 대로 유튜브를 틀어 내가 좋아했던 노래들을 하나씩 클릭해본다. 화면이 보이는 음악은 귀로만 들었을 때의 음악과 감상의 농도가 달라 아쉽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세상도 나도 이렇게 변했는데. 그 시절 그때의 노래를 하나씩 듣다 보니 <건축학개론> 뺨쳤던 대학시절부터 <응답하라 1998> 비스름한 중/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나 계속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 좋구나. 이렇게 그때의 그 순간을 추억할 수 있다는 건 하다가 아이의 픽업 시간이 되어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이제는 내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보다 우리 아이에게 더 가까운 미래가 되어버린 10대의 기억 역시 웃으며 내려놓는다.
지나간 청춘이 아쉽지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지금 현재를 만들기까지 헤쳐온 날들을 다시 헤쳐 나올 자신도 없다. 오늘 이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온 내게 엄지 척 한번 해 주고, 또 사랑하는 남편에게도 엄지 척 이모티콘 한번 날려준다. 오늘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고마워, 나의 오래된 플레이리스트. 추억도 되살려주고 지금의 소중함도 일깨워줘서. 이제는 새로운 것들도 많이 들어보고 새 플레이리스트도 만들어봐야겠다. 그렇게 매일매일 하루를 쌓아 가다 보면 언젠가 또 웃으며 돌아볼 수 있는 오래된 플레이리스트가 하나 더 만들어져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