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actice, Canggu, Bali
아직도 그 날을 떠올리면, 넘어지는 순간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때처럼 코 끝이 찡해져 온다. 나는 발리에서 살고 있었고, 생일을 맞아 아름다운 길리 섬으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오토바이 헬멧을 쓸 때 머리와 헬멧 사이로 뜨거운 공기가 훅 밀려올 만큼 날씨가 지독히도 좋았다. 우리는 월요일마다 가는 'Monday Ritual' 와룽이 있었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그 와룽에서 밥을 먹은 후에 벌어진 일이니 월요일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는 온갖 바퀴 달린 것들이 많지만, 나는 그중 어느 것과도 인연이 없다. 심지어 둥근 모든 것과도 인연이 없어서, 공과도 인연이 없다. 초등학교 시절 피구 시합을 하면 제일 먼저 죽는 애가 나였고, 체육시간 온갖 구기종목 수행평가는 겨우 낙제를 면하는 수준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자전거를 타고, 그마저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하며,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유형이다. 내가 둥근 것을 싫어하는 건 아무래도 이것이 '굴러가는' 속성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다. 굴러가는 것들은 대개 나의 통제를 벗어나기 십상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성에 내 몸을 싣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모는 건 싫지만 남이 모는 건 상관없다(왜?). 남이 모는 자전거/오토바이/자동차에는 아무 생각 없이 발을 대롱대롱하며 잘도 앉아있다.
문제는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이 그렇듯 방콕이나 하노이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에 오토바이가 필수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곳 중 오토바이가 필수였던 곳을 나열해보면 한도 끝도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태국 섬이나 발리 지역은 대중교통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토바이가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하다. 덕분에 함께 여행 중인 나의 절친이자 남자 친구 B는 오토바이를 매우 속성으로 배워야 했고, 그의 안전 제일주의 마인드 덕분에 별 다른 사고 없이 태국의 우기까지 버텨 낼 수 있었다. 그와 내가 동일한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가 운전하고 내가 뒤에 타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일하는 미국 회사의 시간에 맞추어 미국 타임존에 맞추어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생활 패턴은 완전히 뒤집히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그가 기상하는 오후 약 2시경까지, 말하자면 집안에 갇혀 있게 되었다. 그러니 오토바이를 배우겠다고 나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나는 짱구의 힙한 카페와 샵, 살롱들 사이에서 하나씩 내 맘에 꼭 맞는 보석 같은 가게들을 찾아내는 것에 취미를 붙이고 있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던 에코 비치에 첨벙 대고 들어갔다가 선베드에 몸을 펼쳐 말리고 싶었으며, 무엇보다 내가 정말 열중하고 있던 발리MMA의 오전 무에타이 클래스를 듣고 싶었다.
무에타이, 나는 이것처럼 재미있는 운동을 본 적 없다. 동그란 것을 싫어하는 것과 비슷하게 땀 흘리는 것을 싫어하던 내가 유일하게 정 붙이고 하던 운동이다. 사실 나의 무에타이 사랑은 하노이에서 시작되었다. 하노이는 (공기 오염만 없다면) 내가 평생을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도시의 목록 중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이다. 내가 느낀 하노이의 아름다움은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그중 최고는 사람들이었다. 호전적으로 친절한 사람들이라면 좋은 설명이 될까? 그중에서도 내가 기웃거리며 헬스 기구나 써볼까 하고 등록했던 이 체육관은 운 좋게도 쿵후 마스터들이 모여있는 곳이었고, 그중 헤드 코치는 쿵후 마스터이자 킥복싱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팔자에도 없던 무에타이를 배우게 되었고, 영어가 단 한마디도 통하지 않아 심지어 하나 둘 셋도 원 투 쓰리가 아닌 못 하이 바이였던 이곳에서 나는 가족으로 받아들여졌다. 베트남의 설날인 텟(Tet) 파티에 초대되어 알아들을 수 없는 구호를 외치며 일 년 전부터 준비했다는 전통 술을 잔뜩 마시고 돼지 머리를 뜯은 것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발리에 와서도 무에타이는 꼭 계속해야 하는 것이었다. 설령 코치가 하노이 코치처럼 나를 가족처럼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스쿠터 배우기의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비교적 사람이 없는 갱(Gang)에서 살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왕초보인 내가 낼 수 있는 사고를 대비해서 아주아주 한가로운 동네 사원 뒤편 길가에서 연습하기로 했다. B는 오토바이를 몰아본 경험은 많지만 가르쳐본 적은 없었다. 운전을 가르쳐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로써는 '이 바를 당기면 가고, 이 바를 잡으면 브레이크가 작동해'면 충분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도 그의 간단한 설명이면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도 가스가 한 번에 많이 나가지 않도록 바를 천천히, 바이크의 속도를 느끼면서 사근사근 움직였다. 그리고 약 500미터에 달하는 직선 코스를 주행하는 데 성공했다. 아니,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브레이크를 잡을 때까지는.
나는 아직도 왜 오토바이의 엑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가 한 손에 같이 잡힐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오토바이 구조에서 사람들이 별문제 없이 (특히 태국의 경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하여 6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아이들도) 스쿠터를 몰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500미터를 완주한 나는, 그 성취감에 젖은 채 스쿠터에서 내려와 양쪽 핸들을 잡고 사진을 찍기 위해 섰다... 고 생각했다. 그리고 브레이크와 함께 엑셀러레이터를 같이 잡았다. 브레이크보다 엑셀러레이터가 더 힘이 세다. 나는 그것을 경험으로 배웠다. 오토바이는 힘차게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반쯤 날아가며 브레이크를 더 세게 잡았고, 덩달아 엑셀러레이터도 더더욱 세게 잡'혔'다. 엑셀러레이터는 브레이크보다 세므로 나는 계속해서 날아가다가 사원 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내가 계속 브레이크 및 엑셀러레이터를 잡고 있었으므로 바퀴가 계속 돌아갔고, 나는 오토바이와 벽 사이에 끼였다. 오토바이가 바닥으로 내동그라지던 때까지 나는 그 사이에 껴 있었다. 바닥에 등으로 떨어질 때까지도 나는 나에게 사고가 났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언뜻 본 내 오른쪽 발목과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다행히 헬멧을 쓰고 있어 큰 사고는 면했지만 왼쪽 광대뼈가 무척 쓰라렸다. 얼굴도 몸도 다쳤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덜컥 겁이 났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B는 거의 실성할 것 같은 표정으로 내 곁에 섰고, 고맙게도 그 갱에 살던 사람들이 다 튀어나와 각종 응급처치를 해주었으며 택시를 불러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내가 몰았던 오토바이의 핸들은 완전히 뒤틀려 운전이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오래된 스쿠터일수록 돌기가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당신의 발목은 생각보다 여리다는 것과 복숭아뼈 아래에 인대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스쿠터의 뾰족한 돌기가 바깥쪽 복숭아뼈 바로 아래를 뚫었고 뼈가 보였다. 의사는 이게 꿰매 질까 걱정된다고 이야기했지만 결국 마취제를 잔뜩 놓고 꿰매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세 달간 절뚝거려야 했고, 총 다섯 달 동안 바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몸에 다시 힘이 붙었을 때 다시 체육관에 나가고 싶었지만, 슬쩍 킥을 차보니 무릎과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포기다, 힘이 쭉 빠졌다.
우리가 살던 발리 집은 홍콩인 룸메와 하우스 셰어를 하는 형태였다. 나의 룸메 웬디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멋진 사람 중 하나다. 홍콩의 은행가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엄청난 연봉을 받았으나, 40살이 되던 해 전부 다 그만두고 코팡안에서 4년간 살면서 사람들과 바닷가에서 음악도 없이 춤추고 요가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45세가 되어서야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여, 리조트룩 콜렉션을 디자인하고 브랜드 런칭을 준비하기 위해 동남아 패션의 메카 짱구에 왔다. 그녀는 지속 가능한 삶, 요가, 에코 프랜들리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고를 겪었을 때에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나에게 힘이 돼주기 위해 평소 열던 우먼스 서클을 우리 집에 호스트 하여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고, 우울해하는 나에게 그림 도구를 쥐어주며 사고가 나서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에 있는 순간을 즐길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냐고 해주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체육관 가기를 포기하고 시무룩해있을 때 요가를 해보라고 권한 것도 웬디였다. B도 원래 요가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와 B는 함께 요가 스튜디오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발리에는 수많은 요가 스튜디오가 있다. 아마 가장 유명한 스튜디오는 The Practice일 것이다. 잘란 판타이 바투블롱을 따라 바다로 향하다 보면 오른쪽에 위치한 스튜디오로,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요가 스튜디오 중 하나이다. 발리에 겨울이 없다는 건 상식이지만, 그 덕분에 사계절 오픈 스페이스에서 요가할 수 있다는 건, 이 샬라에 가지 않는 한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곳에서 Nick이라는 인스트럭터의 지도 하에 Yin요가를 시작했다. 장난 반으로 B의 Forever crush이기도 한 Nick은 한 시간 반 짜리 Yin 요가 클래스를 통해 내가 조금씩 활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일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나는 The Practice의 공간 자체가 가진 힘이 더욱 컸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80% 정도는 떠올릴 수 있는 샬라의 아름다움. 열린 공간으로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새소리가 들려온다. 적당히 어두운 실내와 더운 발리의 공기와 차가운 나무 바닥과 까끌한 요가 매트의 감촉. 지축은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보스터 위에 얹은 팔이나 다리가 중력을 오롯이 느끼는 순간 순간들. 나는 어떤 샤바사나의 순간에도 이 공간을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다. 완전한 휴식을 취하여 공간과 자아와 내면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싶은 때에는 내가 이 공간에 있다고 상상한다.
Yin 요가는 내가 해본 여러 형식의 요가 중 가장 정적인 요가이다. 한 동작을 짧게는 1분 가량에서 평균 2-5분, 길게는 10분까지 홀딩한다. 따라서 몸에 자극이 크게 오지 않는 아사나로 구성되어 있고,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아사나를 정확하게 구사하여야 한다. Yin요가를 통해 우짜이 호흡을 처음 배웠다.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일 아무 생각 없이 하는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또 최선을 다해서 한다는 건 나의 몸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었다. 뼈와 근육과 인대와 힘줄 사이에서 호흡하고, 이로써 인식한 적 없던 나의 몸을 새로이 느껴볼 수 있었다. 특히 우리의 감정을 주관한다고 알려진 골반, 서고 앉고 하는 모든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척추와 같이 평소에 자주 쓰는 부위를 ‘발견’하게 되었다. 다시 걷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나에게 호흡과 몸의 일치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나와 잘 맞는 수업이었다.
아사나들이 자극적이지 않다 보니 초보적인 클래스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나 같은 초보들이 섞여도 티가 나지 않는 클래스인 것은 맞다. 그러나 몸에 자극이 크지 않다는 것은 곧 호흡과 명상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는 것이고, 초보들에게 명상의 시간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마인드 컨트롤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눈을 감고 호흡하다 보면 호흡에 집중하기보다 머릿속에서 떠도는 미친 원숭이 같은 생각들을 따라다니기 쉽다(이 상태를 monkey mind라고 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스트럭터의 디렉션이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널뛰는 원숭이들을 옆으로 제쳐두고 Nick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몸과 정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때는 마지막 샤바사나에서 그가 몸 구석구석의 명칭을 불러주면서 그곳으로 정신을 집중하라고 하는 때였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눈을 감으세요. 천천히, 그리고 길게 호흡을 합니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잘했습니다. 이제 제가 말씀드리는 부위에 천천히 집중하세요. 당신의 두 눈, 두 눈 사이에서 약간 더 올라간 곳에 있는 차크라, 당신의 이마, 오른쪽 눈썹, 왼쪽 눈썹, 콧대, 코끝, 인중, 윗입술, 아랫입술, 입술 아래 오목한 곳, 턱끝, 오른쪽 볼, 오른쪽 턱끝, 오른쪽 귓볼, 귓바퀴, 조금 더 올라가서 관자놀이, 당신의 두피, 머리카락, 왼쪽 관자놀이, 관자놀이에서 천천히 내려와 왼쪽 귓바퀴, 귓볼, ...... "
B는 이때 Nick의 목소리가 무척 관능적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특히 Lips라고 발음할 때). 덧붙여 Nick도 분명히 노렸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해는 가지만 나에게는 관능적이라기보다 마사지사의 손가락 지압 같은 느낌이었다. 인스트럭터의 목소리를 따라 평소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던 몸 구석구석의 신경 다발을 중력으로 쓰다듬고 한 번씩 눌러주는 느낌. 처음에는 원숭이가 뛰어다니는 바람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지만, 한 번 두 번 계속 수업에 참여하다 보니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내면이 너무 시끄러울 때에는 천천히 숫자를 세며 호흡을 이어나갔다. 나는 나의 요가 여정이 Yin 요가로 시작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쉬탕가를 배우고 있는 요즘, 페이스가 빠르고 움직임이 많은 가운데도 원숭이가 뛰어다닐 때가 종종 있다. 대개는 '어떻게 저 사람은 저렇게 어려워 보이는 아사나를 쉽게 할까'와 '저 아사나 아파 보인다'는 생각이 같이 들 때, 즉 나 스스로의 수련보다 다른 사람의 수련이 보일 때이다. 그럴 때면 Yin에서 배운 것처럼 집중과 숫자 세기로 마음을 다잡는다.
이제 샬라로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