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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제이 Apr 20. 2020

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s

며칠 전에는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게 크게 탈이 나서 새벽 내내 토하고 끙끙 앓았다. 화요일에 앓기 시작했는데 완전히 회복되게 된 것은 토요일 쯤이었으니까 닷새가 걸린 셈이다. 평소 감기도 잘 안걸리고 삼 년간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아픈 적 없었던 내가 (Knocking wood) 근 오 년만에 처음 아프게 된 것이 집에 들어온 이후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나는 왜 아팠을까? 그날은 초밥을 시켜먹었다. 그런데 B랑 똑같은 초밥세트를 두 개 시켜 하나씩 먹었으니, 음식 때문에 아팠다면 B도 아팠어야 한다. 땅에 떨어진 걸 먹은 적도 없다. 딱히 더 스트레스를 받거나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고민 끝에 어쩌면 먹는 음식이 너무 바뀌어서 그런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해외에 있을 때는 대부분의 경우에 오븐이 있어서 먹는 음식이 참 달랐다. 각종 야채를 썰고, 소금이나 후추도 없이 올리브오일에 고루 묻혀 오븐에 구워내는 구운 야채가 주식이었다 (대신 그릇 하나 가득 배가 부르게 먹었다). 밖에서 식사를 할 때도 대부분 채식 식당에 갔다. 대부분의 식당은 채식 옵션이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함께 식사할 때도 대부분은 채식 메뉴를 먹었고, 그도 여의치 않을 때는 생선을 시켜먹었다. 가끔 한 번씩 기분을 낼 때는 새우를 잔뜩 구워 먹거나 뉴올리언스식 새우 1kg(!)을 시켜 손가락을 빨아가며 먹기도 했다.


처음부터 채식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은 아닌데, 아쉬탕가를 시작하고 아사나 욕심이 막 커지기 시작하면서 어디선가 채식을 하면 비틀기 동작(애증의 마리차사나D)이 더 잘 된다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사실 내가 들은 이야기의 요는 '과식을 하면 비틀기가 잘 되지 않는다'에 가까웠겠지만). 그런데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꾸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 변화에는 다양한 것들이 포함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완벽한 금연이다.


사실 나는 약 12년간 이틀에 한 갑을 피우던, 라이트하지만 꾸준한 흡연자였다. 그러던 것이 전자담배로 변하고,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비흡연을 지향하면서 금연을 향한 끝없는 여정(...)을 지나왔다. 여행을 하면서 담배를 안피우기란, 그것도 12년 낭만성 흡연자가 담배를 참아내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야경을 보거나 새벽 공기를 맞을 때, 사람으로 미어 터질 것 같은 하노이의 한 2층 바에서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맥주를 마실 때, 흡연이 자유롭던 방콕의 한 수영장에서 누군가가 콜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볼 때, 그도 아니면 흡연 문화가 끝내줬던 (=실내 흡연이 너무나 당연했던) 동유럽 국가를 여행할 때... 막상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면 거지같은 맛이 나고 반도 못피워 꺼버리지만, 그래도 담배와 나의 복잡하고 지지부진한 관계는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계속되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경우의 수를 이렇게나 또렷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내 마음 속 어디 한 구석엔 쭈그러든 흡연 욕구가 있는 것 같다). 


채식 위주의 식단을 선택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보다 큰 무언가를 위해 자잘하고 익숙한 습관을 바꾸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이런 의도적인 변화를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바꾸기로 결정하면서 전반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 작성해둔 메모를 보면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챌린지 → 담배 x 술 x 고기 x 소식 O 요가 O

무엇을 먹을 것인가? → 야채 O 쥬스 X 과일 O 해산물 O 설탕 X 소금 ↓ 

(그리고 설탕 X에서 화살표로 과일 O가 연결되어 있다. 아마 과일을 먹기 때문에 별도의 설탕을 섭취하지 말자는 내용을 적고 싶었던 것 같다.)


한국에 들어오니 전에는 입에도 대지 않던 것들이 하나 둘 씩 식탁 위에 올라온다. 어제는 친척들이 모두 둘러 앉아 할머니가 만들어준 닭볶음탕을 먹었다. 양념 치킨은 일 주일에 한 번씩은 먹고, 가끔 불고기가 올라와도 아주 맛있게 먹는다. 전에는 날이 잔뜩 선 페스카테리언이었다. 요새는 음식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에 조금 더 집중하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식탁에 올라오는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조금은 무딘 무언가 - 이제는 페스카테리언도 채식주의자도 아니게 되었으니 - 가 되어가고 있다. 내가 고기를 한번 입에 넣는 것은 페스카테리언이 되는 것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채식주의자로 가는 과정이니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의지를 가지고 변화하고자 노력하는 모든 과정은 몸에 촘촘히 쌓인다. 또 르상티망으로 뒤덮여 엉망진창이던 머릿속을 가라앉힌다. 아직도 오리지널리티보다는 선망과 시기가 묘하게 얽혀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것에 말그대로 감사하게 되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의 들어가는 말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왜 세상은 하나의 위기에서 또 하나의 위기로 비틀거리며 나아가는가? 항상 그랬는가? 과거에는 더 나빴는가? 아니면 더 좋았는가?" 여행을 떠나기 전, 그리고 요가를 시작하기 전 나는 개인의 성장과 진보라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들을 소유할 수 있는가, 자기 능력(을 위시한 자기 자신)을 얼마나 비싼 값에 팔아 넘길 수 있는가, 나의 외적인 매력은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하는가와 같은 매우 상업적인 귀결을 갖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직 나의 과정은 너무 짧아 모든 경험을 경험치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의 나는 최소한 이 상업적 귀결에 반대할 수는 있게 되었다. 성장과 진보는 단순히 내가 두뇌와 육체로 창출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라 조금 더 거시적인 차원에 있다고. 그리고 이 요가와 채식이라는 오랫동안 내려온 무언가는 내가 이 거시적 차원의 무언가를 조금 더 구체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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