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룸, 2019년 10월 23일
아주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다 모종의 사연이 있다. 그리스 이후로 향했던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가 너무 아름다웠고, 세르비아에서는 인종차별로 크게 마음 고생을 했고, 그러는 와중에도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아쉬탕가 인터미디엇 시리즈를 받았다 (라구바즈라사나는 언제 해낼 수 있을까?). 이후에는 한국에 갔고, 다시 미국에, 이제는 멕시코에 흘러와있다. 사실 이대로 글을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글로 남기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이 보잘것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같은 이유로 인해 글을 쓰기로 한다. 하루의 일상이 특별하고 특별하지 않고는 남의 눈을 의식해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 그 하루를 내가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다고. 그렇게 믿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슬럼프 아닌 슬럼프의 결정적 이유는 나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였던 것 같다. 내성적이고, 사람을 아주 많이 가리고, 까다롭고, 그러면서도 사랑 받고 싶어하는 나에 대해 일종의 혐오감 비슷한 것이 자라났다. 나의 외적인 내용 뿐만 아니라 내면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었고, 인정하기 어렵지만 이 점은 아직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언제나 그래왔듯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상적 모습과 나의 실제는 괴리가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 괴리는 채워지지 않는다. 나 스스로를 너무 과대 평가 한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내 이상적 모습이 그저 '과대 평가'에 불과하다는 점이 나를 무척 힘들게 만든다.
발리에서 지낼 때 나는 큰 감정의 해일을 겪었다. 내가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마주하는 나의 한계점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기를 매우 꺼린다는 점이었다. 아주 상상하기 쉽게도, 그 이유는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할 만한 상황 아래에 오랜 시간 놓여 있어 그것이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상태인지 인식하기조차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이렇다. 으레 그렇듯 나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고, 그 트라우마를 감추려고 자아를 비대하게 키워냈다. 그러니 이 비대해진 자아는 내 모습이 아니다. 그런 자아를 헤치고 내려가 바닥에 있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는 건, 그런 게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고, 진짜 내려가서 마주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30년 가까이 지나 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지를 마주하면서, 내가 보고 있는 건 내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이건 내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다보면 도대체 그 '진짜'가 뭔지 스스로 자문하게 된다.
분명한건 이제 내 진짜 모습이라는 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덮어 씌워 디폴트가 된 나의 모습도 내 진짜 모습은 아니다. 이 두 개 모두 내가 아니라면, 나는 어디있는 걸까?
내가 맨날 사람들에게 하고 다니던 이야기 중 하나는 경험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게 자동으로 경험치로 환산되어 레벨업을 하게 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거였다. 경험을 경험치로 환산하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걸 잘게 부수고 쪼개 소화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게 얼마나 걸릴 진 아무도 모른다. 내 바닥에 그런 모습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마주했다고 해서 저절로 치유되거나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관성적으로 비대한 에고를 만들다가도,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건 그냥 나의 방어 기제에 불과하다는 걸 인식하는 건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 상상하기 쉽게도 그런 노력은 뼈를 깎는 어려움이 동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나의 모습을 모두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을 타계할 수 있는 어떤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참나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밟아가고 싶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남들이 본다는 데 빠져 멋진 글을 쓰려고 머리를 쥐어 짜내는 게 아니라 내가 하루를 보내면서 생각했던 내용을 하나씩 풀어놓고 나의 참나를 찾는다는 의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