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시골, 마케팅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지금 당장 고개를 들어 컴퓨터가 놓인 책상이나 자신이 앉아/서 있는 공간을 둘러보면 무엇이 보이는 지 보자. 내 눈 앞에는 컴퓨터와 마우스, 텀블러, 아이패드와 휴대폰, 블루투스 이어폰, 아몬드가 담긴 작은 종지와 책 12권, 독서대가 보인다. 나는 아주 편안한 요가 바지와 요가탑, 티셔츠, 속옷을 입고 있고, 내 손가락에는 결혼 반지와 패션 반지가 양손 하나씩 끼워져있다. 이 모든 것은 책상 위에 놓여져 있으며, 독서대 옆에는 스탠드도 있다. 텀블러 안에는 70% 녹은 얼음과 약간의 커피가 담겨있다. 남편의 책상에는 커브형 모니터와 노트북, 키보드, 무선마우스, 손목보호대, 책상용 깔개, 텀블러 세 개와 커피가 담긴 보온병이 있고, 유리로 된 구형의 조명, 카메라와 작은 모자, 달력이 있다. 또 갈색 토분에는 (무려) 식충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렇게 나열해놓으면 물건이 엄청나게 많은 것 같지만, 우리집에 와본 모든 이들은 우리집이 '텅 빈 듯 하다'는 말에 공통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집에는 빈 공간이 많다. 쓰지 않는 물건은 없다.
관점을 조금 바꿔보자. 대부분의 물건이 '배송'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배송을 위해 고용된 인력이, 연료를 소비하는 자동차 혹은 오토바이를 통해 물건을 싣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건을 나누어준 것이다. 또한, 이들이 배송될 때에는 봉투 혹은 박스에 담겨왔다. 잠깐, 각각의 물건은 저대로 태어나지 않았다. 제조사에서는 원재료를 수급해야 하고, 원재료를 조합하고 변형하여 해당 상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최종 상품을 제조하는 곳에서는 원재료를 소비해야 한다. 또한 판매처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최종 상품을 조금 더 팔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계속해서 광고를 내보내고, 이 광고를 위해서도 위에 설명한 것과 동일한 과정으로 광고지가, 인터넷 광고가, 간판이 만들어진다. 이렇듯 우리는 물건의 왕국, 광고의 세계에서 나고 자란다. 도시에서 자란다면 이런 내용은 전혀 알아차릴 수 없다. 나를 사달라고 외치는 수많은 물건들, 그 사이에서 때로는 갓성비로, 때로는 하울이라는 이름으로 감추어지고 당연시되는 소비의 사슬은 투명하여 보이지 않는다. 식생활에서도 이러한 소비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피자를 시켜먹고, 치킨을 시켜먹고, 비비고 육개장을 사먹고, 양념해 파는 고기를 사다먹고, 삼겹살을 먹고, 해물탕을, 만두국을, 사골곰탕을, 갈치조림을, 삼계탕을, 케이크를, 쿠키를...... 돈을 내면 물건은 손에 들어온다.
최근 내가 이해하게 된 단어 중 하나가 트리거(Trigger)다. 트리거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자극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떨 때 물건을 구매해야 한다고 느낄까? 우리가 물건을 구매하도록 만드는 자극은 어떤 것일까? 소셜 미디어는 보다 친근한 방식으로 광고를 전달하고, 심리적 측면에서 보다 깊은 층위에서 소비 욕구를 자극한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인플루엔서가 브이로그에서 특정 제품을 먹거나, 입거나, 사용할 때 그 물건을 구매하고 싶을 수 있다. 또는 지나가다가 굉장히 예쁘게 꾸며져있는 커피숍이나 식당, 혹은 매우 맛있는 음식을 팔 것 같은 노포가 보인다면 그곳에서 파는 음식을 먹고싶을 것이다. 새로 나온 아이폰 광고를 본다면 잘 돌아가는 내 휴대폰에서 저 아이폰으로 갈아타야 할 것 같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실제로 내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 지와 관계 없이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매개체가 된다.
최근 제주에 이사온 이후 나의 명랑성은 하늘을 찌른다. 남편과 나와 강아지는 결국 종류만 조금 다를 뿐, 세살 어린이 정도의 명랑성으로 매일을 살아간다. 밖에 나가 오래 풀 들여다보기, 꽃이 피고 지는 모습 관찰하기, 밭의 보리가 익어가는 모습 바라보기, 바다에서 산책하며 작은 바다 생명체 들여다보기, 산책하다가 산딸기 따먹기 등등. 처음에는 이러한 삶의 변화가 단지 사는 곳의 변화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점차 시간이 지날 수록 내 생활의 질이 올라간 결정적인 이유는 '광고'로부터의 자유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도보 반경 45분 이내에 가게가 없다. 홍보를 위한 간판도, 물건을 소비하고 싶도록 만드는 가게의 외관도,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도 없다. 게다가 비건 지향으로 돌아서고 나니 밖에서 외식할 만한 곳을 찾을 필요도 없고, 그저 마트에서 장을 보는 정도의 소비만이 가능해졌다. 처음에는 박스를 엄청 까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주거의 형태가 잡히고 모든 것들이 제 자리를 찾기 시작하자 물건을 사는 일은 매우 줄어들었다. 광고에서 벗어나 소비에 들어가는 시간을 자연에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제주에 이사온 후 누리는 최대의 선물이다.
이제는 필요한 것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만드는 것은 아직 대부분 음식들이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아침으로 먹는 맛있는 그래놀라를 사기 위해 직구를 이용해왔다면, 지금은 그래놀라를 만들어 먹는다. 예전에는 어쩌다 한번씩 특별한 기분을 느끼려고 사마셨던 콤부차를 이제는 집에서 만든다. 우유 요거트를 먹지 않고 소이 요거트를 만들어먹는데, 그러다보니 비건성도 지키고 플라스틱 프리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소비하는 삶에서 만드는 삶으로 변화하는 것은 정말 많은 부분에서의 변화를 필요로한다. 소비하는 삶은 매우 손쉽고 간단하지만, 만드는 삶은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딱히 싸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의 변화가 의미있는 것은 이러한 결정이 우리를 본질적인 질문으로 환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돈을 벌어 무엇에 쓸 것인가? 돈을 버는 이유는 간단하고 손쉽고 조금 건강에 나쁘며 지구에 해를 끼치는 방식의 삶을 살면서 보다 비싼 것들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을 보장하기 위한 것인가? 나는 내가 만든 요거트에 내가 만든 그래놀라를 말아먹으며 이런 질문에 관해 곱씹는다. 비싼 수입 요거트와 그래놀라를 먹을 때보다 지금이 백 배 쯤 행복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