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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제이 May 20. 2021

실망스러운 요가 수련이 주는 교훈

30대가 되고 나서야 느낄 수 있는 삶의 다른 단면

오늘은 비가 온다. 어제는 뭘 했더라. 오전에는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헥헥대며 들어와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이틀 연속으로 날씨가 좋아 매트를 들고 테라스로 나가 해를 쬐고 요가를 했다. 매트에 누워 뒹굴거리다가 번역계획서를 쓰려고 준비중인 책을 읽다가 이게 도대체 상품성이 있겠나 싶어 갸우뚱했다. 밥 생각이 안나 한동안 밍기적거리다가 오후가 지나서야 스무디를 만들어먹고 마트에 다녀왔다. 남편이 피자를 만들어주었다. 비건 소시지를 넣은 피자였는데, 남편은 소세지를 해동하기 위해 그냥 소세지만 덜렁 물에 넣었다. 알아차리고 난 후에는 물컹물컹 보기 싫은 모양이 되어 아깝다 생각하며 버렸다. 새로 꺼낸 소세지를 올려 구운 피자는 정말 맛있었다. 자기 전에는 중둔근 운동을 했다. 후방경사인 골반을 생각하며, 배에 힘주는건 귀찮다고 골반으로 걸터 서있던 20대의 나를 매우 치고 싶었다. 등등.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요가복을 입고 매트에 설 무렵 갑자기 엄청나게 메스꺼워 구역질을 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려고 요즘 일찍 일어나고 있는데, 6시에 눈이 떠지는 날이면 왼쪽 눈에 다래끼가 올라온다. 나는 운명처럼 8시까지 자야하는 사람인가?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니 일단 계속 일어나보라고 한다. 10대, 그리고 20대의 나는 일찍 일어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밤에 오래도록 깨어있었고 아침에는 달콤하게 늦잠자는 것이 최고라 여겼다. 그런 나를 달갑게 볼 리 없었던 엄마는 내게 소리도 지르고 욕도 했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밤에 깨어 있으면 일어나있는 시간은 똑같은데 왜 자꾸 일찍 일어나라고 하는거야?' 엄마는 대답 대신 '니 맘대로 해!'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일찍 일어나는 건 깨어있는 시간을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한방 먹였다'고 생각했던 나의 질문은 처음부터 글러먹은 것이었다. 


나는 잠을 잘 못자면 갖가지 병이 생긴다. 예를 들면 오늘만해도 왼쪽 눈에 곧 다래끼가 올라올 것 같은 알싸한 느낌이 들고, 턱에는 두드러기가 올라왔으며, 매트에 섰을 때는 메스꺼웠다. 눈이 충혈되고 에너지 레벨이 마이너스를 찍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반적인 기분도 좋지 않고 부정적인 생각도 많이 든다. 내게 최적의 수면 시간은 7시간 반에서 8시간 사이이다. 그런데, 12시간을 자도 6시간 미만을 잔 것과 비슷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새로운 발견이다. 10대와 20대 때에는 잠을 자는 시간에 비례하여 컨디션이 좋았는데, 30대가 되고나니 몸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느낀다. 물론 변화가 오는 지점은 잠과 관련된 내용 뿐만이 아니다. 사실 나이가 들었으니 변화의 방향이 부정적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내가 더 나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우선 체력이 더 좋아졌다. 아, 그런데 이건 체중이 늘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변화일 지도 모른다. 20대의 아노락시아 시절 39키로를 찍고 (나는 169cm다) 겁이 나 밥을 먹기 시작한 이래 나의 체중은 증가 일로에 있다. 그런데 웃긴 것은 20대 초반 저 아노락시아 시절의 최저점을 지난 후 체력 역시 증가 일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두 시간의 아쉬탕가 시리즈 수련을 끝낸 후 30분쯤 쉬고 한 시간 반짜리 하타 숙련반 수업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다.


아쉬탕가. 하타. 제주 이사 후에는 정말 뜨뜻미지근하게 수련하고 있다. 최근에는 요가에 관해 회의적 생각이 종종 든다. 나는 이제껏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요가가 얼마나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곤 한다. 요가는 정말 좋다, 몸과 마음의 수련이다, 호흡과 정신이 합일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요새 내가 하는 요가는 몸에 치우치고 형상에 집착하며 다른 사람과 경쟁하려 하는 요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특정 아사나에 집착하고 (특히 후굴), 그래서 발야킬야를 잡은 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 못내 부러워서 그 사진을 보고 또 본다. 내 수련을 할 때가 오면 어떻게든 발목을 잡아보려고 바둥거리다가 넘어지기 일쑤고, 그나마 잘 할 수 있는 아사나는 사진으로 남겨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것이 요가인가? 예전에 나는 아주 어려운 아사나에서도 숨으로 환원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아사나 수련의 이유라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아주 쉬운 아사나에서도 고급 아사나에서 느끼는 그 정신 상태와 몰입도를 똑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발야킬야를 잡냐 못잡냐가 아니라, 티리앙에서 무릎까지 타고 올라올 수 있느냐가 아니라, 후굴에서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그 지점에서 다시 편안한 숨으로 돌아오는 그 짜릿함을 파스치마타나사나에서, 자누시르샤사나에서, 밧다코나에서, 사바사나에서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못한다. 아직은. 선생님 말씀대로 오래 길게 볼 수 있어야 할텐데. 헤드라이트에 달려드는 날파리같이 요가하고 있구나.


수련 내용이 실망스러워도 어쨌든 삶은 계속 이어진다. 요새 그런 것을 많이 느낀다. 삶이 삐그덕거리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 근시안적으로 무언가에 달려들고 집착하기 때문일까? 나에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수련이 조금 삐그덕대지만 평균치로 보자면 나는 최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아주 단순한 것들이 주는 기쁨을 느낀다. 키우는 화초가 새순을 내는 것을 지켜보는 것. 빵을 굽는 것. 요리를 하고 이웃과 나누어 먹는 것. 책을 읽는 것. 책을 읽는 방식에도 변화가 왔다. 예전에는 읽어치웠는데, 요새는 조금 더 음미하며 읽는다. 삶을 살아치우지 않고 조금 더 음미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처럼. 지금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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