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을 ChatGPT에게 던져보았다
이전에 올린 글에서는 내가 12년 전에 끄적인 메모를 GPT에 올리고 그것을 하나의 에세이로 만들어준 경험을 공유했었다.
과정을 잠시 복기하자면,
1) 12년 전에 노트에 쓴 '원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라는 메모를 GPT에 남기고
2) 이 메모와 비슷한 주장을 한 철학자나 사상가를 알려달려달라고 한 후,
3) 2)에서 추출한 철학자나 사상가의 말을 인용해서 메모를 에세이 형태로 다듬어줄 것을 요청했고,
4) 에세이의 톤은 카를로 로빌리의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과 유사한하게, 다정하고 읽기 쉬운 톧으로 워싱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요랬는데
요래됐음당
책을 많이 읽다 보면, 가끔 착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제 꽤 많이 아는 것 같아.’ 누가 어떤 개념을 처음 말했고, 무슨 주장을 했고, 어느 사조에 속하는지 줄줄 외우게 되면, 그런 생각이 더 쉽게 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복잡할 땐 그런 지식들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는 것 같은데, 생각이 굴러가지 않는다. 그럴 때 문득 깨닫게 된다. 지식은 쌓였지만, 사유는 깊어지지 않았구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누군가가 어떤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어떤 의문을 품고, 어떤 벽을 만나고, 어떤 길을 돌아 나왔는지를 따라가 보는 일.
바로 그래서 우리는 원전을 읽어야 한다.
누군가 대신 정리해 준 요약본은 마치 뉴스 기사 같다. 드라마를 직접 보지 않고 기사로만 줄거리를 접했을 때처럼, 흐름은 알 수 있지만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배우의 표정, 눈빛, 미묘한 침묵의 길이 같은 건 사라진다. 사유도 마찬가지다. 요약된 개념 뒤에는 늘 생략된 생각의 곡선이 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야기했다. 아렌트에게 ‘사유’는 단지 지적인 활동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악을 저지른다”고. 그 말이 처음에는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
미셸 푸코는 지식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늘 어떤 맥락과 권력 안에서 만들어진다고 봤다. 단순히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했구나’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왜 그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묻는 일, 그것이 진짜 앎이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새로운 질문이 시작된다. 생각이란 늘 ‘모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가다머는 말한다. 읽는다는 건, 텍스트와 대화하는 일이라고. 텍스트는 고정된 정보가 아니라, 그때그때 새롭게 말을 건네는 생명체다. 우리가 원전을 읽는 건 그래서다. 한 철학자가 남긴 오래된 문장을 통해, 지금의 내가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게 되는 그 과정. 그게 바로 생각하는 힘, 다시 말해 사유의 근육을 기르는 일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단지 아는 것보다, 느리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느린 생각은, 삶을 훨씬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애초에 이걸 시작한 이유가 멋들어진 글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 시절 내 생각의 한조각을 이렇게 정리해보는 그 자체에 만족하며 잠에 들던 찰나ㅡ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이 글을 쓴 것은 나인가, AI인가?
그래서 물어보았다.
결국 중요한 건 누가 썼느냐가 아니라, 그 글에 담긴마음이 누구의 것이냐는 거 아닐까?
이 대답을 듣고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쳤다.
창작자의 손끝에서만 탄생할 수 있었던 글쓰기라는 창작행위가,
이제 음악이나 미술처럼 프로듀싱과 에디팅의 영역으로 변화하는걸까?
그래서 다시 물어보았고,
GPT는 이렇게 답했다.
위 대화를 통해 내 안에 두 가지 생각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GPT의 말처럼 문장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ChatGPT와 같은 도구는, 이제 '대화 상대'이자 '공동 창작자' 이다. 이 말은 이제 누구나 내 글을 도와줄 출판사의 '편집자' 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나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는!
그렇다면 이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원재료' 를 채굴하는 것이다. 마치 광산에서 원석을 캐는 것 처럼, 매순간 무수히 쏟아지는 '새벽별 속삭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포착하려는 감각과 태도가 필요하다. 세공은 기술이 해준다. 내 안의 원석을 발굴하는 감각과 그것을 채굴하는 실천적 태도는 인간의 것이다.
GPT의 말처럼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의미의 주체'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잘 쓰여진 글'이나 ‘문장의 유려함’ 과 같은 글에 대한 기술적인 평가는 큰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디지털로 만든 대중음악에서 '연주의 질'를 논하지 않듯이, 그래픽 디자인에서 '채색의 완성도'를 논하지 않듯이 말이다. (물론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의 가치를가질 것이다. 디지털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어도, 여전히 순수예술은 존재하는 것 처럼.)
글이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어떠한 상품이든, 그것의 핵심 아이디어가 '누구' 로부터 '어떤 서사'를 거쳐 나왔는지가 더욱 중요해지는 세상이 올 것이다.
결국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양산' 된 결과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여기에 담겨있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 ‘행위의 과정’이다. 기술이 최종 생산물을 이렇게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어가는 시대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그 안에 조금이라도 묻어있는 인간의 냄새를 찾으려 할 것이다. 강아지들끼리 만나면 서로 엉덩이냄새를 맡으며 동족임을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