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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Oct 22. 2024

서문


달 없는 밤이었다.

모자 장수는 어둠 속에 잠긴 극장 무대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수많은 객석 의자들이 그의 앞에 늘어서 점점 깜깜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무대 위에 앉아 손을 움직여 바늘에 실을 끼우고, 멋진 은색 가위로 천과 리본을 자르고 있었다. 물론 그가 만들고 있는 것은 모자였다. 모자 장수는 늘 달이 없는 밤이면 같은 모양의 모자를 만들기 시작해서, 보름달이 뜰 때 즈음 그 모자를 완성했다.

모자 장수가 바쁘게 모자를 만들고 있을 때 왼쪽 문으로 그림자 하나가 들어왔다. 

⌜곧 달이 차오를 거야, 모자장수.⌟

체셔가 길다랗게 웃어보이며 무대 위로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털이 나 있는 큰 꼬리로 그의 손을 휘감았다. 체셔의 몸은 우울하고 다채로운 보랏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라앉는 배에 물이 차오르듯 머지않아 보름달이 뜨겠지. 너는 지금 네가 타고 있는 배의 밑바닥을 뜯어내고 있는 거야.⌟

모자 장수는 체셔의 꼬리에 휘감긴 손을 우아하게 빼냈다. 그는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끈 하나를 골라 그의 꼬리에 리본을 묶어주었다. 

⌜나의 사랑하는 고양이, 너는 의심하고 비아냥거리고 사라지지. 하지만 너를 이해해. 네가 머리라면 나는 심장이고, 내가 사랑이라면 너는 증오지. 너와 나는 정반대이지만 하나를 이루는 거야.⌟

체셔의 긴 꼬리가 모자 장수의 코를 스쳤다.

⌜여왕이 그 말을 들으면 네 목을 칠걸. 그 여자는 네가 아무리 모자를 만들어도 앨리스를 풀어주지 못할 거야. 앨리스가 풀려나는 게 너무 무섭거든.⌟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까지, 체셔는 길게 웃었다.

⌜달이 차오르면 그 사실을 다시 알려주러 그 아이가 오겠지.⌟

꼬리부터 시작해서 귀를 마지막으로 체셔는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나 체셔의 웃는 입만은 남아, 조각배처럼 하늘 높은 곳으로 떠 가고는 하늘에 걸렸다. 이빨들이 엇갈려 빈틈없이 맞물린 초승달을 보며 모자 장수는 노래 같은 체셔의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수백 번 수천 번 널 절망으로 망가뜨릴 그 아이가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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