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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Oct 27. 2024

미지의 얼굴


  아이는 박수갈채 소리에 묻혀 있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그럴 것 같았다.

  귓가에는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맴도는데 모자에 가려 암흑이 된 시야에는 끝없이 깊은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일그러졌다.

  아이가 모자를 들어 올렸을 때 눈앞에는 모자장수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이제 일어나야지, 아가야.⌟

  아이가 모자를 그에게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장에 매달린 모든 보름달에서는 빛이 사라져 있었다. 객석은 어둠에 잠겨 아이는 각각 다른 모양이었던 의자를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그 극장에 유일한 빛은 무대를 비추는 둥근 등 하나뿐이었다.

  ⌜당신이 J.L 이었군요.⌟

  ⌜글쎄, 나도 궁금하구나. 나는 나를 잃은 지 오래되었거든. 그래서 잊어버린 모양이야.⌟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모자장수라는 사실은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모자를 만드는 거잖아요.⌟

  모자장수는 아이의 손을 이끌고 극장을 나섰다. 집 안과 통로를 밝히던 촛불은 모두 꺼져 있었다. 어둠 속에 언뜻 리본들이 매달려 있는 것이 희뿌옇게 보였다. 모자 장수는 말했다. 

  ⌜나는 모자 장수고, 모자를 만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를 안다고는 말할 수 없어. 모자를 만드는 건 그게 내가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내가 사랑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내가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야.⌟

  아이의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그 말이 맴돌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아이는 기시감을 느꼈다.

  ⌜언제 어디선지 모르겠는데……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모른 척해주렴! 이건 내 역할이거든.⌟

  모자 장수는 웃어젖히다가 아이를 위한 문과 자신을 위한 문을 하나씩 열었다. 모자장수의 집을 나오자 두껍고 검은 겨울나무들 틈으로 달빛이 흘러들었다. 모자 장수는 아이를 이끌고 숲을 빠져나갔다. 이따금 아이의 발밑에서 바스러지는 나뭇가지들의 소리가 침묵을 덮어버리곤 했다. 아이는 그 소리가 꼭 사라져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곱게 부러져 바스러지는 소리 같아, 되도록 나뭇가지를 밟지 않으려 했지만 겨울나무로 얽힌 통로의 천장에 매달린 등불들은 모두 꺼져 있었다. 밤하늘도 보이지 않아 빽빽한 가지 틈새로 흘러드는 달빛만으로는 모자장수의 얼굴도, 짓밟히고 바스러지는 나뭇가지들도 똑똑히 볼 수 없었다.

  ⌜등불을 좀 켜면 안 돼요?⌟

  ⌜미안, 그렇게는 못해. 그녀가 오고 있고, 그녀는 내 역할을 좋아하지 않거든.⌟

  ⌜그게 누군데요?⌟

  ⌜이런 세상에! 설마 그녀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재키, 하트의 여왕 말이야.⌟

  그들이 숲을 빠져나왔을 때 보인 것은 넓은 평원이었다. 어항을 보는 눈동자처럼 크고 둥근 보름달이 밤하늘에 걸려 있었고, 평원을 가로지르는 선홍빛 홍차의 물줄기가 보름달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달빛은 보름달답지 않게 여전히 어렴풋하고 은은하여, 아이는 평원을 휘젓는 것들의 실루엣만 보일 뿐, 그것들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그림자를 흘리고 다니는 유령 같기도 했고, 흩날리는 나뭇잎 같기도 했다. 

  바보 같기도 하지! 저렇게 큰 나뭇잎이 어디 있담!

  아이는 생각했다. 그러나 도대체 저건 무엇일까? 밤의 평원을 휘저으며 돌아다니는 저 그림자들은 무엇일까? 아이는 물었다.

  ⌜저것들은 뭐예요?⌟

  ⌜뭐긴, 트럼프 카드잖니! 분명 또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가까이 갈수록 아이는 모자장수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은 각기 다른 모양의 트럼프 카드로, 모두 희고 가는 팔에 붓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것들은 양손에 붓을 쥐고 칼부림처럼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홍차가 흐르는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가로수처럼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아이는 그 모양이 꼭 천장 없는 궁전의 기둥처럼 보였다.

  나 같으면 장미에 색을 칠하기 전에 나무부터 잘 다듬을 텐데! 저렇게 축 늘어진 게 아니라 동그랗게 다듬으면 훨씬 예쁠 거야.

  아닌 게 아니라 나무들은 기이하리만큼 우스꽝스러운 모양이었다. 양쪽 모두 일렬로 늘어선 나무들은 버드나무의 머리칼처럼 나뭇잎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동화 속 라푼젤의 머리칼처럼 나뭇잎이 엮인 모양이라, 아이는 그것들을 잡고 올라가면 나무 꼭대기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시냇물 왼쪽에 있는 첫 번째 나무의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때, 하트 1 카드가 붓을 들고 붉은 장미에 금색을 칠하고 있었다. 그 카드는 아직 붉은색으로 남아 있는 다른 장미들을 내버려 두고, 이미 온통 금빛으로 물들다 못해 금색 물을 뚝뚝 흘리는 딱 하나의 장미꽃만을 팔을 마구 휘두르며 연거푸 칠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이가 인사하자 하트 1 카드는 고개를 돌려 아이의 금빛 머리칼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뿐 그 카드는 다시 마구 팔을 휘둘렀다.

  ⌜안녕.⌟

  ⌜저…… 죄송한데 이미 그 장미는 충분히 금색인 것 같은데요.⌟

  하트 1 카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물론 그 카드도 트럼프 카드인지라, 고개만 젓는다는 것이 온몸을 휘젓는 꼴이 되었다. 그 바람에 손에 든 붓에 듬뿍 묻어 있던 금빛 페인트가 아이의 얼굴과 모직 외투에도 튀고 말았다.

  ⌜아니야, 아니야. 이 장미가 장미가 아니게 될 정도로 금색이어야 해. 그래야만 장미가 장미가 아니게 돼서 발이 달린 것처럼 도망가지 않지! 하트의 여왕은 그걸 원해.⌟

  아이는 자신의 외투에 튄 금색 페인트가 인형에도 묻었을까 싶어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지만 마지막 인형은 그곳에 없었다. 아이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인형……내가 인형을 어디에 뒀었죠?⌟

  그러나 모자 장수 또한 아무 데도 없었다. 아이는 당황했다. 하트 1 카드는 계속해서 장미를 금빛으로 칠하며 웅얼거렸다.

  ⌜인형? 무슨 인형을 말하는 거니?⌟

  ⌜아 나는, 재키한테 인형을 받았는데…… 앨리스를 따라가서 그 얘기들을 들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아이가 막 호주머니를 뒤지던 손을 빼내고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의 눈앞에는 수많은 카드들의 얼굴이 있었다. 그것은 양손에 든 붓에서 모두 금빛 페인트를 뚝뚝 흘리며 선 거대한 군중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아이의 금빛 머리칼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속에서 끊임없는 속삭임이 풀려나왔다. 

  왔어.

  레코드를 되감듯 끊임없이 똑같은 음조로 반복되는 속삭임을 들으며 아이는 그것이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명인 듯도 하고, 보름달에서 흘러내리는 빛인 듯도 하고, 장미꽃에서 뚝뚝 떨어지는 금빛 물인 듯도 하고, 소름 끼치도록 푸르고 넓은 평원인 듯도 하고, 어쩐지 계속해서 다가오다가 이지러지는 카드들의 얼굴인 듯도 했다.

  여왕에게 데려가야 해. 여왕에게 데려가야 해. 여왕에게!

  카드들이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속삭이자 맨 앞에 서 있던 하트 1 카드가 아이에게로 다가서며 웅얼거렸다.

  ⌜내가 할게. 내가 이 애를 여왕에게 데려갈게.⌟

  아이의 눈에는 그 하트 1 카드가 어항을 들여다보는 눈동자같이 거대해 보였다. 그 뒤로 달이 걸려 있었다. 그때 무리의 뒤쪽에서 하트 3 카드가 걸어 나왔다. 그 카드는 양손에 든 붓을 하트 1 카드에게 넘기며 중얼거렸다.

  ⌜아니, 내가 할 거야. 넌 장미를 칠해. 붉은색을 금색으로.⌟

  하트 1 카드는 손안에 든 네 개의 붓을 머리카락 같이 늘어진 나무의 잎사귀 사이사이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나는 여왕의 딸이야. 특별한 자리에는 특별한 카드가 와야 해. 그리고 여왕의 옆자리는 특별하지.⌟

  ⌜특별한 카드는 특별한 자리에 오지 않아. 그 자리는 특별한 카드가 오기 때문에 특별한 게 아니야. 특별한 자리에는 누구나 올 수 있어. 그 자리는 비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특별한 거고, 그 자리에 앉는 카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하트 3 카드는 희고 가는 팔을 내밀어 아이의 손목을 쥐었다.

  ⌜특별한 카드는 비어도 되는 자리에 오길 좋아해. 그럼 그 자리는 그 카드가 아니면 비어 있어야 하는 자리가 되니까. 그러니 가! 가서 장미를 칠해!⌟

  하트 3 카드는 아이를 이끌고 보름달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들이 모여있는 다른 카드들을 지나칠 때마다 그것들은 하나둘씩 나무 앞에 자리를 잡고 팔을 휘두르며 장미를 금빛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그림자가 나타나듯 희끄무레한 실루엣이 보였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아름답게 다듬어진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럼 당신은 평범한 사람인가요?⌟

  ⌜일단은 나 역시 여왕의 딸이기는 하지.⌟

  ⌜그럼 당신도 평범하지 않네요!⌟

  ⌜평범한 건 없어. 자신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있을 뿐이지.⌟

  그리고 카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아이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밤은 조용했다. 

  아이와 하트 3 카드는 수많은 나무들과 수많은 카드들을 지나치며 잔디를 밟고 계속해서 걸었다. 

  아무리 멀리까지 내다보아도 뜨거운 홍차가 흐르는 시냇물과 양쪽으로 늘어선 장미 나무들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보름달 아래 도사린 그 그림자가 무엇인지 아이는 알 수 없었다. 가까이 갈수록 그것이 대단히 크고, 대단히 아름답고, 대단히 정교하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아이가 카드에게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묻자 카드는 나는 내 역할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하고 웅얼거렸다.

  ⌜모자 장수도 그 말을 했어요. 이곳의 모두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무슨 말이 그렇니? 넌 지금 ‘이곳의 모두는 살아있나요?’ 라고 물은 거야.⌟

  그리고 하트 3 카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이는 이제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금빛으로 휘황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궁전이었다. 

  그 궁전은 고대의 신전처럼 기둥과 문까지 아주 정교하게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는 데다가, 그 빛은 보름달보다 훨씬 더 밝아 태양같이 환했다. 아이와 카드는 거대한 문 앞까지 걸어갔다. 아이가 덩굴처럼 아름다운 그 문의 금빛 손잡이를 감아쥐자, 옆에 서 있던 하트 3 카드는 온 길을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잠깐 그 네모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었다.

  눈앞에는 거대한 나무 십자가가 있었다.

  아이의 등 뒤에서 문이 무겁게 닫혔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는 색유리로 된 창이 있었고, 달빛인지 궁전의 광채인지 모를 빛이 창문을 뚫고 다채로운 색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솔즈베리 대성당이었다.

  아이는 몸을 돌려 도로 문을 열려고 더듬었으나 문 안쪽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나무로 된 낡은 문에 손을 짚고 아무리 밀어보아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체 안에서 열지 못할 문이면 무슨 쓸모가 있담!

  아이는 다시 앞을 향했다. 아이의 눈앞에는 양쪽으로 난 아름다운 창문의 빛과, 거대한 나무 십자가, 그리고 그 앞에는 둥근 잔디밭이 있었다. 그곳에는 촛불도 등불도 없었지만, 이상스러운 선명함을 품은, 새벽이나 저녁같이 엷은 어둠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그 긴 복도를 걸어 앞으로 갈수록 이상하게도 거대해지는 나무 십자가와 그 앞에 자리한 잔디밭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대리석같이 딱딱하고 윤이 나는 바닥 한가운데 그 잔디밭은 느닷없이 드러나 있었다. 아이는 다가가며 그 잔디밭이 냉기 감도는 바닥 위에 덮어둔 러그 같다고 생각했다.

  색유리의 춤추는 빛을 받은 잔디밭에는 카드 셋과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들은 각자 뛰기도 하다가,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가만히 섰다가, 별안간 총총히 걸어 다니곤 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술래가 셋인 술래잡기 같았다. 

  무슨 놀이가 저렇지? 

  잔디밭의 바로 앞까지 다가섰을 때 아이는 세 카드가 모두 얼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들은 종잇장처럼 팔랑거리며,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네모난 몸뚱어리를 유령처럼 흔들며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가 그 카드들을 보느라 몸을 기울일 때, 금빛 머리칼을 커튼처럼 휘날리며 뛰던 소녀가 아이 앞에 멈춰 섰다. 

  ⌜안녕.⌟

  ⌜안녕.⌟

  아이는 소녀와 마주 서서 인사했다. 귀밑에서 잘린 소녀의 머리칼은 부스스한 금빛이었고, 소녀의 옷은 넝마 조각처럼 찢기어 낡고 더러웠다. 소녀는 맨발로 잔디밭에 서 있었다.

  ⌜춥지 않아? 겨울이잖아.⌟

  ⌜난 여왕이 주는 옷보다는 내 옷을 더 좋아해.⌟

  ⌜하트의 여왕? 그녀는 어디에 있는데?⌟

  소녀는 손으로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거대한 나무 십자가를 가리켰다.

  ⌜저 십자가 너머에. 그녀가 너를 이곳으로 보냈지?⌟

  아이는 그대로 서 있다가 물었다. 그럼 재키가 하트의 여왕이야?

  소녀는 아이의 말에 웃었다. 

  ⌜너도 바보같은 재키구나. 답을 들으면 뭐가 더 확실해지니? 답과 질문은 하나도 다르지 않아. 모자 장수가 너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아이는 모자 장수가 이야기해주는 재키처럼, 아주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소녀는 그대로 잔디밭을 밟고 서 있었다.

  희뿌연 실루엣의 빈 카드들은 그녀의 뒤에서 저마다 앉았다가, 뛰었다가, 걸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 누구도 소녀에게 뛰라고 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도 소녀는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아이는 소녀의 어깨 너머 그 광경을 보았다가, 잔디밭에 고요한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빛을 보았다가, 자신의 눈을 바라보고 선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뒤에 있는 유령 같은 카드들을 흘겨보았다.

  ⌜이건 코커스 경주(Caucus race)야. 각자 뛰고 싶을 때 뛰고, 걷고 싶을 때 걷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춰. 그렇게 원을 그리면서 도는 거야. 계속계속. 그러다 보면 언제 시작했는지도, 언제 끝나는지도,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다 잊어버리게 돼. 영원히.⌟

  소녀의 발이 러그 같은 잔디밭을 쓸어 나가다 그 밖에 있는 아이의 신발 코를 건드렸다. 날 가두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야.

  ⌜하트의 여왕이 너를 가두는 게임을 하라고 해?⌟

  ⌜그녀의 사랑이란 그런 거야.⌟

  소녀는 다시 잔디밭 위를 거닐기 시작했다. 아이는 잔디밭 주위로 원을 그리며 소녀를 따라 걸었다. 아이는 물었다.

  ⌜여왕은 왜 그런 것을 사랑해?⌟

  소녀는 걸으면서 말했다.

  ⌜여왕은 확실한 것을 좋아해. 그래서 인간을 싫어하고, 그래서 이곳을 만들었지. 이곳의 모두는 그녀고, 그녀는 이곳의 모두를 알아. 그러니 너도 알겠지. 이건 네가 겪은 일이고, 그들이 겪은 일이고, 내가 겪을 일이니까.⌟

  아이는 묘한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계속해서 잔디밭 주위를 돌았다. 아이는 빈 카드들을 바라보았다가, 저 멀리 손잡이 없는 오래된 나무 문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는 평원이, 장미를 칠하는 트럼프 카드들이, 모자 장수의 집이, 동면 쥐가 있을 것이다. 

  아이는 가장 정확한 말을 찾아내듯이 마른 입을 움직이며 말했다.

  ⌜나는 인형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

  소녀는 걸음을 멈추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서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거리다가, 주먹을 쥔 채로 손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소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소녀의 손에서 황금열쇠가 빛나고 있었다.

  ⌜물론이지, 재키.⌟ 



  소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거대한 나무 십자가 앞까지 걸어갔다.

  소녀가 손잡이를 잡아당기기 전에 아이는 이미 그 문이 위쪽으로 열릴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안에는 등불이 천장에 매달려 고풍스러운 복도와 홀을 밝히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홀의 중앙까지 나란히 걸어갔다. 그곳에는 붉고 아름다운 커튼과 둥그렇게 둘러싼 수많은 문들이 있었다. 

  소녀는 곧장 걸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문은 수많은 문들이 이룬 원의 시작점이자, 원의 마지막이었다. 소녀는 등 뒤로 팔을 뻗어 손잡이를 움켜쥔 모양으로 뒤를 돌았다. 

   ⌜문을 열어볼까?⌟

  소녀는 다정하게 웃지도 않았지만, 대답을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물었다. 소녀의 손에 들린 황금열쇠를 보면서, 아이도 마치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것을 묻듯이 물었다. 네가 A.L 이지?

   ⌜응, 나는 앨리스 리델(Alice Liddell)이야.⌟

  넝마 조각 같은 소녀의 옷은 어쩐지 저쪽의 잔디밭보다 이곳의 홀에 더 잘 어울렸다. 이상하지, 하고 아이는 시선은 소녀에게 붙박은 채로 웅얼거렸다. 꼭 술래잡기를 하다가 찢겨버린 것 같은 모양인데도.

  ⌜재키, 문을 열고 싶어?⌟

  아이는 모르겠어, 하고 대답했다. 

  ⌜나는 이제 인형이 하나도 남지 않았어. 문을 열면 인형들이 나한테 돌아와줄까?⌟

  ⌜사람들은 인형을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어. 원래 인형은 살아 있거든. 모두 자기들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어. 너의 이곳처럼. 그런데 어른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지. 인형들이 꼭 자기들 체스판의 말인 줄 알고 있어. 그래서 어른들은 슬픈 거야. 슬프고, 화나고, 아프고, 불행하고.⌟

  소녀가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었을 때 소녀는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아주 기쁜 것 같기도 했다. 소녀는 손잡이를 놓고 흐르듯 아이에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아이 앞에 섰을 때는 아주 얇은 종잇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황금열쇠를 쥐어주었다. 아이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인형들을 모르면, 그럼 어떻게 문을 열어?⌟

  ⌜원래 문을 연다는 건 그런 거야.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거야.⌟

  소녀는 아주 투명한 얼굴로 말했는데, 아이는 소녀의 얼굴이 꼭 물 같다고 생각했다. 그 안에 모든 것들이 비쳤다가 사라져 갔다. 소녀의 얼굴은 체셔의 털이 그러하듯이 시시각각으로 색깔을 바꾸고 형태를 바꾸는 듯했는데, 다만 체셔가 강렬한 색으로 불타올랐다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면 소녀의 얼굴은 투명한 물 같이 끝없이 흐르고 있었다. 아이는 그것이 아름답다가도, 어디서 깊어지고 얕아지는지 알 수 없는 바다를 보는 것처럼 두려웠다.

  소녀는 다시 문으로 걸어가 손잡이를 쥐고는 고개만 아이를 향해 돌렸다.

  ⌜문을 열고 싶니?⌟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면, 아이는 마치 저 안의 구석마다 죽음처럼 무시무시한 것이 자신을 기다릴 것 같았다. 아이의 모직 외투를 얼룩지게 하고 더럽힐 슬픔이나, 동화책에 나오는 이빨이 날카로운 괴물 같은 것들이 숨어서 어디선지도 모르게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이가 그저 갈가리 찢기고 더러워진 소녀의 옷자락을 바라보는 동안 철컥 소리가 났다. 아이는 외쳤다.

  ⌜잠깐만! 거기로 가려는 거야?⌟

  그러나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

  아이가 손안의 황금열쇠를 움켜쥐며 소녀에게 닿게끔 소리를 질렀지만, 활짝 열린 문으로 소녀는 걸어 나갔다. 물결같이 새하얀 햇빛이 소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곧 소녀는 사라졌다.

  아이는 손안에 쥔 열쇠와 문을 바라보았다. 아이에게는 이미 단 하나의 인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십자가의 문이 있었다. 아마도 그 너머에는 잔디밭에서 유령 같은 카드들이 텅 빈 몸뚱어리를 흔들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텅 빈 평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선홍빛 냇물을 어항을 들여다보듯 바라보는 눈동자같이 거대한 보름달이 있을 것이다. 다만 그뿐일 것이다. 

  죽음처럼 영원한 확실.


  아이는 짓눌리는 비명을 지르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빛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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