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무대 뒤의 침침한 복도를 걸어갔다. 그 끝에는 먼지 냄새가 몸부림처럼 끼쳐오는 작은 방이 있었다. 그녀는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는 작고 둥근 나무 탁자와, 빛바랜 붉은 커튼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양초의 불빛조차 존재하지 않는 완연한 암흑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그 방의 촛불에 불을 밝힌 날로부터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방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으면 어둠 속에서 늘 그 산만하고 이상스러운 시선을 닮은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면 불길 같은 주홍빛 물결이 일순 방안에 밀려든다. 그러면 그녀는 늘 생각한다. 아마 그녀는 그림자가 되어 있는 거라고. 자신은 그림자가 되어 건너편 집 발코니에 서 있고, 점차로 방을 채우는 불길 가운데 시의 여신이 여위었으나 작지 않은 몸을 세우고 서 있다고. 구불구불한 머리칼 사이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산만한 시선에는 광기와 사랑과 슬픔이 시(詩)로 어려 불길처럼 일렁거린다고.
⌜어서 와요, 예니.(Velcommen, Jenny Lind.)⌟
그러나 그가 늘 이상한 음조로 그렇게 부를 때면, 예니는 더욱 이상하게도 자신 안의 학자와 그림자가 마주 보고 고요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림자를 부끄럽게 느끼지 않았고, 학자의 차분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예니가 자리에 앉자마자 종이와 잉크를 꺼내 들고 글자들을 적어 내렸다. 그녀의 공연을 구상해온 결과였다. 그러면 그녀는 그와 마주 보고 앉아 그가 쓰는 것을 읽었다. 그는 쓰는 중간중간 촛불의 심지를 돋우거나, 팔 밑에서 구겨지는 그녀의 소맷자락을 정리해주곤 했다.
그 방에서, 그녀는 촛불이 방에 열기를 흩뿌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럴 때 모든 것은 변했다. 빛바랜 붉은 빛 커튼도, 삐걱대는 비명을 지르는 나무 의자도, 방 뒤편의 빨랫줄 같은 줄에 걸린 그녀의 옷도, 나무 탁자도, 그 위를 짚은 그녀의 손목과 팔도 어쩐지 양초의 불빛으로 물들어 밝게 빛을 발하는 듯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무대 뒤 이곳은 더 이상 코펜하겐의 뒷골목, 비명이 터지리만큼 너무나 평범한 낡은 극단이 아니라고. 이곳은 언젠가 그녀가 만났던, 시의 여신의 발코니라고. 그 발코니에서 차분히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며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갈망해온 것을 그녀는 얻고 있었다.
마치 물결처럼 흐르는 옷의 무늬처럼, 그녀는 자신의 모든 추악함과 아름다움이 곧고 투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의 옷이었다. 그녀는 그 옷을 입으면, 유리창에 간 금에서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창밖의 가로등은 무대의 기둥이었으며, 그녀 안에서는 따뜻하고 검은 목소리가 끊임없이 샘솟았다. 예니는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의 모든 몸짓을 설명하는 그의 눈동자와 긴 손가락을 보면서, 자신의 모든 추악함과 아름다움이 노래가 되어 자유를 얻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가장 갈망했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한때 경멸했던, 구불거리는 머리칼 사이로 산만한 시선을 어쩐지 올곧게 자신에게로 향하는 이 기이한 예술가에게서. 그가 이따금 촛불의 심지를 돋우며 불꽃을 부추길 때 그녀도 생각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고 싶다. 코펜하겐의 극단에서, 이 나라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람에게.
그럴 때면 그녀는 부러 팔 아래로 소맷자락을 구겨버리곤 했다.
그는 생각한다.
모든 것이 그녀의 저 바닷속 숲길 같은 눈동자에 있다.
무대에 선 예니 린드는 흰 얼굴을 하고 있다. 무언가 신경질적인 것이 그녀의 얼굴을 위로 들어올리고 있고, 그녀는 무너지는 듯한 얼굴로 노래를 부른다. 그는 객석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서서히 그녀의 시선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목격한다. 그녀는 짙어진 푸른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길어올린다. 그것은 진하고 쓴 어떠한 것이다. 그녀의 깊은 눈이 그것을 마실 때 그는 가장 강한 신을 보는 것과 같이 그녀를 올려다본다.
그녀는 매일 무대에 올라 그 신경질적인, 무너지는 듯한 얼굴로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자신을 조롱하는 어둑하고 침침한 둥근 등 아래에서 고개를 쳐들고, 자신을 끌어내리는 빈 객석 위에서 노래한다. 그는 생각한다. 그녀가 저 얼굴로 죽음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죽음보다도 깨끗한 얼굴일 것임을. 매일 무대에 올라 어두운 빛을 받는 그녀의 얼굴은 수백 번 무너져 가장 고결하고 순수한 무언가인 것을.
예니 린드는 무대가 끝나면 몸을 곧게 세우고 걷는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올 때 마치 물기 가득한 풀밭을 밟으며 걷듯 들어온다. 그러면 그는 그녀의 시선이 방 안의 모든 것을 알아보는 것을 느낀다. 예니는 자신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강하고 섬세하게, 무엇 하나도 빼놓지 않고 느낀다.
그녀는 절대로 유예하지 않는다. 그녀는 곧바로 그의 앞에 앉는다. 그리고는 공연이 끝난 뒤의 희미한 얼굴로 그의 이야기를 듣는데, 그가 말할수록 그녀의 무구하고 푸른 눈은 성실하고 끝없이 깊어진다. 그녀는 그의 모든 단어를 듣고, 가져간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돌리고 팔을 움직인다. 그녀는 어둠으로 춤을 춘다. 그 어둠은 처음에는 방 안에 있는 것인 듯하다가, 그녀 자체가 된다.
그녀가 그의 이야기에 맞춰서 노래를 할 때, 그녀는 그 눈으로 곧게 그의 눈을 바라본다. 그녀의 바닷속 숲길 같은 눈동자는 그의 이야기를 알고 있고, 그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그녀의 노래에서 읽어내는지를 확인하듯 바라본다.
그러면 그는 자신 안에 있는 그림자를 느낀다. 그의 그림자들은 가까운 곳에서 몸을 낮추고 돌아다닌다. 그림자들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지팡이를 짚을 때도 이상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는 그림자들이 어떤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다. 언제 그 어둡게 웅크린 몸을 우뚝 일으키며, 대체 무슨 말을 토해낼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늘 한쪽 눈으로 그림자들을 밀어내듯 내려다본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그림자들의 얼굴을 불을 밝힌 듯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 얼굴은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림자들은 더 이상 몸을 숙이고 어둠을 뒤집어쓰지 않는다. 그 역시 언제 고개를 쳐들지 모르는 불안정한 아이를 보듯이 그림자들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는 탁자 위로 구겨지는 그녀의 옷자락을 정리해줄 때, 어머니의 그림자도, 에드바르의 그림자도 느끼지 않는다. 모든 그림자들은 그저 자신의 모습을 하고 조용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헤매는 일 없이 올곧게 그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알아본다.
그러면 그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발을 굴렀다가 공손히 인사를 했다가 겸손했다가 오만했다가 조용했다가 활발했다가 주저앉았다가 미소를 지으며 누군가를 일으켰다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녀는 선택하거나 유예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곧게 세우고, 그 모든 것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그것으로 춤을 추었다.
그러면 그의 눈빛도 푸른 물에 가라앉는 것처럼 잠잠했고, 작은 방에서 그들은 무표정할 정도로 고요한 눈빛으로 대화했다.
먼지 냄새가 끼쳐오는 방 안에서 촛불을 돋우고 한참을 이야기하는 일은 자주 몸의 감각과 시간을 잊게 했다. 그러면 그들은 가끔 벽돌빛 커튼에 가린 창문을 열고, 안개 낀 하늘이든 맑은 하늘이든 바라보며 밤바람을 쐬었다. 그러다 보면 둘은 더 큰 욕망에 사로잡혀 함께 밖으로 나가 아무도 없는 밤거리의 가로등 아래를 거닐곤 했다.
예니 린드는 먼지 냄새가 흩뿌려진 방 안에 잠겨 있었다. 곧 공연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촛불의 심지를 돋우고 방 안을 돌아 걸었다. 그녀는 빈 옷걸이를, 창문의 금을 가리고 붉게 흘러내리는 두꺼운 커튼을, 나무 탁자를 지나치며 돌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그 모든 것을 지나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탁자 앞에 멈춰 섰다. 나무 탁자 앞에는 하나의 의자만이 놓여 있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앉아 있었던 그 의자 반대편에 그대로 서서 문 없는 방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얼굴을 한 존재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그가 그린 시의 여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가를. 무대에 오르는 그녀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그녀는 몸을 곧게 펴고 무대로 걸어갔다. 그녀는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 입안에서는 쓴맛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속이 독처럼 무언가를 길어올리고 있다고 느꼈다. 그 안은 아주 깊고 검은 물과 같이 잠잠했다. 그녀는 소리 없이 계속해서 걸으며 시의 여신을 떠올렸다. 시의 여신은 어떤 얼굴을 한 존재인가를.
그러나 거울같이 검은 물 위에는 그의 얼굴이 어두운 달처럼 떠올랐다.
그의 얼굴은 그녀와 아주 닮아 있었는데, 다만 그의 왼쪽 눈은 그녀의 오른쪽 눈 같았고, 반대로 오른쪽 눈은 그녀의 왼쪽 눈과 같았다. 그녀는 어두운 복도를 걸으면서 마치 사방이 그 검고 어두운 거울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일순 파도처럼 빛이 밀려들었다.
예니 린드는 이제 무대에 오르고 있었다. 계단을 차례로 올라서며 그녀는 자신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거세게 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객석은 꽉 차 있었다.
그녀는 무대에 섰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 안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아니야.
그녀는 맑게 빛나는 둥그런 등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니야.
그녀는 말했다.
그 날 밤, 그들은 달 아래의 어둠에 있었다. 긴 그림자 같이 그는 서서 말했다. 그녀가 노래할 때의 푸르고 강한 눈동자를. 그녀가 노래하지 않을 때는 끊임없이 사물들을 관찰하는 그녀 눈의 아름다움을. 그녀의 가장 내밀한 추악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자신이 그것을 올려다보며 죽음보다 강한 힘을 느낀다는 것을.
아니야.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사랑이 아니야.
그는 까만 어둠을 등지고 서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 뒤의 어둠이 검은 물 같았다. 그것은 거울처럼 그를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를 비추던 거울은 모두 일그러졌다. 그리고 한치도 보이지 않는 검은 물 속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살아 움직이는 길고 창백한, 그의 손이었다.
그녀는 공포를 느꼈다. 거울 속에서 빠져나온 그의 손이, 곧 빠져나올 그의 얼굴이, 그것을 마주 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어떤 얼굴을 한 존재인가?
그녀는 깊고 검은 물 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그가 두려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달 아래 그의 눈을 분명히 보고 말았다. 그 눈은 언제나처럼 시로밖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광기처럼 어려 일렁거렸다. 그 눈이 묻고 있었다.
나 는 어떤 존재인가?
사랑이 아니야. 그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녀는 무대 위에 있다.
그녀는 춤을 추다가, 두 팔로 끌어안다가, 다시 팔을 내뻗으며 몸부림치곤 했다.
객석은 모두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리며 노래를 부르다가 그의 자리에 시선이 닿았다.
그 자리에는 웬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의 모자는 너무나 커서 돔처럼 얼굴을 뒤덮다시피 했다. 아이는 두 손으로 모직 외투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보고 싶었다. 그것은 너무나 간절하고 괴로운 그리움이라 꼭 사랑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가 노래를 좋아하는지, 객석을 채운 이들은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는지,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특별한 것인지, 특별해지는 것인지,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지,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지, 그녀는 무엇을 사랑하는지.
그녀가 조명 아래에서 멈췄을 때 박수갈채가 극장을 채웠다. 그녀는 온몸이 그 끔찍한 소리에 폭발해버리는 듯했다.
문득 그녀는 무대 위에 선 여인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