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자 학자는 다시 발코니로 나와 있었고, 램프를 그의 바로 뒤편에 갖다 놓았다. 그림자는 언제나 자신의 보호자가 될 주인이 필요할 테니까. 그러나 학자는 그림자를 불러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방 안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그의 서재 방문을 아주 가볍게 두드렸다. 문 앞에는 너무도 비쩍 말라서 이상스러워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옷차림은 단정하고 고급스러워 점잖은 인상을 주었다. 그 사람은 자신을 학자의 그림자라고 소개했다.
"나를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하겠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당신의 옛 그림자를 알아보지 못하나요? 당신의 몸을 떠난 이후로 맞은편 집에 3주를 머물렀답니다. 그 집에 누가 살았는지 알아요? 그건 바로 시의 여신이었어요!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알아요!
만약 당신이 그 집으로 건너왔다면 당신은 사람으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대신 그림자인 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거죠! 그와 동시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시를 사랑했으며, 시와 불가분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녀는 서 있었다.
그녀는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먼지 낀 등은 뿌연 한낮의 어둠을 뚫고 그녀의 머리 위에서 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움직이면서, 어제보다도 더 비어 있는 객석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비어 있는 객석과, 누군가 앉아 있는 객석을 구분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지 않았다. 익숙하고 침침한 그녀의 깊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시의 여신을 생각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먼지 낀 극장에 있을 것인가. 내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을 것인가.
그녀는 다시 물었다.
내 눈은 멀어버린 것이 아닌가. 내 눈앞에 그녀가 서서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을 것인가.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나를 사랑해주었던 시간은 모두 가버린 것인가. 시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가.
"나는 인간의 눈으로는 보기 힘든 것까지 전부 다 볼 수 있었답니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추악해요! 인간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점들만 아니라면 나는 정말이지 인간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상할 수도 없는 추악한 장면들을 목격했답니다."
"나는 이 세계의 진실,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에 관한 책들을 쓰고 있어요. 하지만 요즘은 아무도 그런 책을 읽으려 들지 않으니 문제예요. 내가 진심을 바치는 일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못하니 절망적인 기분이랍니다!"
그러자 그림자가 대뜸 말했다.
"나라면 그러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세상을 잘 몰라요. 그런 식이라면 혼자 고민하다가 병들고 말 거예요."
그러나 그의 글은 틀렸다.
그녀는 그보다도 더 그림자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림자는 불빛이 있어야만 나타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림자는 한낮에도 존재하고, 깊은 밤에도 존재하고, 거미줄로 뒤덮인 뿌연 무대의 등에도 존재하고, 객석에 앉은 그들의 얼굴과 수많은 빈 자리에도 존재한다.
무대 뒤의 침침한 복도에도 존재하고, 그 끝의 먼지 냄새 끼쳐오는 작은 방에는 더더욱 존재하고, 나무 의자에 비명에도 존재한다. 매일 읽는 그 책에도 존재하고, 그 책장을 넘기는 내 손에도 존재하고, 글자를 스치는 내 눈에도 존재하고, 한낮의 어둠조차 양초의 불빛조차 닿지 않는 저 깊은 나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글은 틀렸다.
그림자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비쩍 말랐지만, 저토록 말을 잘 하지 못한다. 그림자는 늘 같은 어조로 늘 같은 말만을 반복한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 사람들이 더 이상 연극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너의 노래는 사람들에게 유혹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너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러나 어느 순간 그녀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무 의자에 앉아 읽는 신문에는 매일 새로운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천박한 그림자 같은 예술을 논하고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학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처럼 무겁고 고고한 예술을 이야기하는 학자들은 당당히 신문에 실려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고,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를 신문에 싣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한낮의 어둠으로 빠지지 않았다. 별안간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우뚝 섰다. 그곳에는 천박한 그림자도, 고고한 학자도, 더러운 대중도 없었다. 그곳에는 오직 그녀 혼자 뿐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더 이상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런 날이면 그녀 안의 그림자는 침묵하고, 학자가 거대한 종을 치듯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크게 벌리고 선언했다.
너는 사랑받을 수 없다. 너조차도 너의 노래가 지루해 사랑하지 못하여
사랑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너조차도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는 네가 노래를 왜 부르는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네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에.
어느 날은 그녀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양쪽 귀에 대고 속삭이는 학자와 그림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그의 동화에 나온 대로 끔찍한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움직였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
나는 노래로 살아갈 수 없다. 나에게 인간은 추악하고, 예술은 지루하다. 그림자도 학자도 아닌 나는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
그날 저녁 커다란 무도회장에서 공주는 그림자와 함께 춤을 추었다. 공주의 몸놀림은 사뿐사뿐 가벼웠지만, 그림자는 그보다 더욱 가볍게 움직였다.
그들이 두 번째로 춤을 추었을 때, 공주는 이미 그림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들이 세 번째로 춤을 추었을 때, 공주는 하마터면 그림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뻔했다.
그림자는 학자에게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그냥 그림자라고 불려야 해. 그리고 내가 1년에 한 번 햇빛 환한 발코니로 나가 군중 앞에 모습을 보일 때면, 너는 평범한 그림자들과 마찬가지로 내 발치에 누워 있어야만 해. 난 이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기로 했거든! 바로 오늘 저녁이 결혼식이야."
학자는 소리쳤다.
"안 돼, 말도 안 돼! 그건 싫어. 그건 나라 전체를 속이고 공주마저 속이는 짓이야! 내가 전부 다 얘기하겠어. 내가 사람이고 너는 그냥 옷을 걸친 그림자라고 털어놓을 거야!"
하지만 그림자는 냉담했다.
"아무도 네 말을 믿지 않을걸."
그림자가 공주에게 설명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답니다. 아무래도 어리석은 내 그림자가 미쳐 버렸던가 봐요. 자기가 사람이고 내가 자기 그림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버린 거예요. 그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공주도 낯빛이 변했다.
"세상에, 어쩌다가 그런 끔찍한 생각을!"
그림자가 한숨을 쉬었다.
"영영 회복이 안 될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불쌍한 그림자! 그런 불행을 겪다니. 광인으로 한평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텐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자들의 목숨을 고통 없이 끊어주는 일이 필요한 것도 같아요."
그날 저녁 도시 전체가 수많은 등불로 대낮처럼 휘황한 가운데 은은한 축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주와 그림자가 발코니로 나와 모습을 보이자 군중 속에서는 커다란 환희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학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한스.
그녀가 그의 소설을 다 읽은 것은 5일이 지난 어느 한밤중이었다.
그녀는 겹쳐진 종잇장들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었는데, 그녀의 손가락에는 거의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녀는 금이 간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밖은 조용했으며,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곳에 환호하는 군중들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저곳에 밤의 군중들이 있다. 낮의 군중들이 밝히던 형형한 불이 모두 물러간 뒤, 밤의 군중들이 저곳에 서 있다. 그녀는 그들의 환호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방 안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바깥의 복도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바라보았다. 붉고 무거운 커튼, 옷걸이에 걸린 옷들, 나무 탁자와 나무 의자, 그리고 그 위에서 조용히 빛을 내는 촛불을. 그녀는 이곳에 죽은 학자가 있음을 볼 수 있었다. 학자는 모든 고통을 안고 있었다. 학자의 눈에는 빈 객석이 있었고, 학자의 목에는 끊임없이 부르는 노래가 있었고, 학자의 다리에는 희뿌옇고 먼지 낀 무대가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학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귀부인처럼 흰 얼굴과, 이상스러이 아름답고 무구히 빛나는 어두운 푸른 눈동자를. 저 창밖 고요한 밤의 거리에 있는 밤의 군중들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리고 처음으로 그녀는 온전히 그 방에 섰다. 방 안의 모든 사물들이 보일 만큼만의 빛을 발하는 촛불을 보며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죽은 학자가 있었고, 환호를 받는 그림자가 있었고, 그녀 자신이 있었다. 밤의 군중들은 죽은 학자를, 낮의 군중들은 그림자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동시에 느꼈다. 모든 것이 추악했고, 모든 것이 아름다웠으며,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영원 같은 평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탁자로 다가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스치듯이 종잇장들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키가 큰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느꼈다. 그 아름다운 존재는 그녀가 잃은 모든 것들과 집착하는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추악함과 아름다움을, 노래에 대한 열망과 공포를 모두 보고 있었다.
그녀는 시의 여신이 자신과 함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출처: 『안데르센 동화집』중 '그림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