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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조 Oct 23. 2024

두 번째 인형 (1) - 한낮의 어둠

  

  그리고 그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언젠가 그가 처음 코펜하겐에 왔을 때 지나온 골목같이, 낡고 좁은 그 길 끝에 있는 창고 같은 문을 열면, 빨랫줄 같은 거미줄이 널려 있고, 먼지 낀 햇빛이 떠도는 그 작은 극장 안의 객석에. 

  그곳에서 만난 신사가 입던 것과 같은 옷을 입고 그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객석에 앉은 사람은 열댓 명 남짓이었고, 극장은 거짓말같이 어두웠다. 

  어둑하고 침침한 한낮의 어둠이었다. 보름달같이 둥그렇고 싯누런 불이 비추는 무대 위에는 여인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몸짓과 목소리를 들으며 낡은 그 극장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 앉은 나이 많은 남자는 턱 밑을 끊임없이 매만졌다. 이따금 그 나이 많은 남자는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여 무어라 속삭이곤 툴툴대며 몸을 바로 세우고는 했다. 

  그는 사실 그 말이 진실되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여인의 노랫말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랑인지, 미움인지, 동정인지, 혐오인지, 위선인지 모를, 어쩌면 그 어떤 것도 아닐지도 모르는 표정을 마주하듯 그는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도 아니면 실상은 노래를 듣고 있는 것조차 아니었던가. 귀부인처럼 흰 얼굴을 보고 있었던가. 이상스러이 아름답고 무구히 빛나는 어두운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던가. 

  그는 다시 묻기 시작했다.

  그도 아니면 실상은 그 표정을 보고 있었던가. 신경질적이고 절망스러운 표정을 보고 있었던가. 아직 소년일 적 그렇게나 매만지기 좋아했던 부드러운 옷을 입고 앉은 그를 보고, 그의 표정을 보고, 이따금 그를 흘긋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그의 옆에 앉은 나이 많은 남자를 보고, 그의 표정을 보고, 자리에 앉은 다른 이들을 보고, 그들의 표정을 보고, 극장의 빈 의자를 보고,

  그토록 나락에 빠지며 지르는 단말마처럼 눈동자에 스쳐 가는 그러한 표정을 보았던가.

  문득,

  그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옆자리의 남자가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연 도중에 극장을 나서려는 줄로만 알았다. 해서 그는 고개를 들어 다른 자리가 모두 비어 있는 것과, 여인이 무대에서 사라져 있음을 확인하고도 공연이 끝났다는 사실을 얼른 깨닫지 못했다.

  오늘도 안 만나고 가십니까?

  그는 나이 든 남자의 손에 들린 하얀 편지 봉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지팡이를 짚고 그대로 극장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무대 뒤의 복도를 걸었다.

  거미줄이 빨랫줄처럼 널려 있고, 침침한 한낮의 어둠마저 닿지 않아 밝혀둔 양초의 불빛이 스며 나오는 곳까지 걸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늘 먼지 냄새가 몸부림처럼 끼쳐오는 문 없는 방이 있었다. 퇴색된 붉은빛으로 흘러내리는 커튼에 가려진 금이 간 창문, 그 아래 놓인 작고 둥근 나무 의자. 벽에 걸린 줄에 매달린 먼지 낀 옷이며, 중앙에 놓인 둥근 나무 탁자와 의자 하나, 그 위에 놓인 새하얀 편지 봉투. 

  불을 태우는 양초와 둘둘 말린 신문지 옆에 놓인 그 편지 봉투가 흰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선 채로 신문을 펴 넘겼다. 그녀가 신문의 끝장까지 다다라 도로 그것을 덮고 자리에 앉을 때 낡은 나무 의자는 절망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물론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는 늘 첫 줄에 앉아 구불거리는 머리칼 사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상스럽게 산만한 시선으로 그녀를 좇았으며, 늘 찡그린 얼굴의 노인을 통해 편지를 보냈다. 그 여위었으나 왜소하지 않은 남자를 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편지 봉투를 뜯어 읽고는 신문 위에 내려놓았다.

  그럴 수는 없다. 

  그 남자를 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온 세상이 그에게, 그의 소설에, 그의 동화에, 그의 상상에, 그의 위선에 미쳐있는데 어떻게 그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겠는가. 놀랍도록 어둡고, 음침하고, 기이한 그의 동화를, 모든 신문이 금덩이처럼 퍼다 나르는 그의 글을, 모든 평론가가 미쳐있는 그의 글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사여구를 빼앗아다, 도둑질해다, 스스로 치장하는 그의 글을, 대체 어떻게 모를 수 있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 그 글이 그러한 명성을 그 남자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가.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이고, 도피적이고, 얄팍하고, 유희적이고, 천박한 그 글이, 인간을 인간답게 그리지 못할망정 인간을 현실로부터 내던지는 그 글이, 아편에 중독되듯 천박하고 유혹적인 몸짓으로 버러지 같은 글자들의 범벅으로 평론가들을 유린하는 그 글이!

  그럴 수는 없었다.

  감히 인간을 통찰한다는 말을 그런 더러운 몸뚱이에 입힐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글은 자격이 없다.


  그녀는 신문을 한쪽으로 치웠다. 

  그리고는 팔을 뻗어 편지를 몸 앞으로 끌어와, 아주 느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그것을 뜯어냈다. 그의 필체는 기이하고 울퉁불퉁했다. 그녀는 천천히 비웃듯이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편지에 동봉한 자신의 소설을 그녀의 무대로 올리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는 그녀에게 꼿꼿하고 단호한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당신의 노래는 고통이 없는 밤과 같습니다. 

  '고통이 없는 밤'!

  그녀는 웃었다.

  그런 더러운 글로 더러운 대중의 더러운 환심을 사는 이가 그따위 소리를 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고통 속에서 인간을 고민하는 이들에게서 평론과 예술과 고귀함을 도적질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따위 얄팍한 머리와, 뇌와, 손과, 글이 나를 기만할 수는 없다. 감히 그따위로 돈을 긁어모으고, 투자자를, 후원자를, 관객을 긁어모으는 인생이 위선을 떨며 나를 치켜세울 수는 없다.     

  그녀는 편지와 신문을 한데 싸서 어둠과 먼지로 쌓인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붉은 커튼 아래 놓인 의자로 다가가 그 위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다시 탁자로 돌아와 의자에 앉으며 그녀는 책을 펼쳤다.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그녀는 읽었다.

  이제 그녀는 미동 없이 앉아 책장을 넘기는데, 그 나무 의자는 그녀가 매 순간 일어났다가 앉기라도 하는 듯 필사적으로 삐걱대는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그녀는 책을 읽었다.

  언제까지나 울려대는 비명 소리를 환각처럼 들으며 그녀는 책을 읽다가, 글자를 읽다가, 책장을 넘겼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눈은 필사적으로 책장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토록 부릅뜬 눈으로 어떠한 생각을 막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인지 미움인지 동정인지 혐오인지 위선인지 모를 글을 읽으며, 어쩌면 그 모든 것일지 어떤 것도 아닐지 모를 그 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조금도 그 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그러한 책을 읽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고, 그러한 노래를 듣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고, 그러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 남자의 그러한 글을 혐오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고, 그 남자의 명성을 혐오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는 별안간 몸을 일으켰다. 오래된 나무 바닥과 의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갔다. 붉은 커튼 뒤에는 창문이 있었고, 그녀는 그곳에 금이 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커튼을 거칠게 닫았다. 그러자 커튼이 드르륵 피아노를 치는 소리를 내며 한쪽 끝까지 밀렸고, 창문에 간 금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모든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그러한 책을,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고, 그 남자의 글과 명성을 혐오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깊은 곳, 한낮의 어둠조차 양초의 불빛조차 비치지 않는 저 어딘가에는, 사랑받을 수 없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그림자처럼 홀로 서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울려대는 그 비참한 비명을 환각처럼 들으며 그녀는 책을 읽다가, 글자를 읽다가, 책장을 넘기다가, 마침내 편지에 함께 실려 온 그의 소설을 읽었다.


    

  어느 날 밤 학자는 우연히 잠에서 깨었다. 

  열어 놓은 발코니 창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와 커튼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 때 맞은편 집에서 뭔가 이상한 불빛이 보였다. 꽃들이 한 송이 한 송이 찬란한 색의 불길이 되어 빛을 뿜었다. 꽃들 사이에는 날씬한 몸매의 매혹적인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 또한 꽃과 마찬가지로 광채를 내뿜는 듯했으므로 학자는 정말로 눈이 부셨다.

  침대에서 내려온 학자는 살금살금 커튼 뒤로 다가갔으나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광채도 사라졌다. 꽃들은 늘 그렇듯이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었으나 찬란한 빛을 내뿜지는 않았다. 약간 열린 발코니 문틈으로 감미롭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기분이 저절로 황홀해지는 음악이었다.

  "내 그림자야, 안으로 들어가렴. 들어가서 살펴본 다음 나에게 모두 말해 주렴!"

  학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맞은편 집 발코니에 있던 그의 그림자도 일어섰다. 학자가 몸을 돌리자 그림자도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학자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닫았을 때, 만약 누군가 주의해서 자세히 살폈다면 그림자가 맞은편 집의 반쯤 열린 문 안으로 슬쩍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출처: 『안데르센 동화집』중 '그림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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