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이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까마귀는 왜 책상을 닮았지?
아이는 돌아와 있었다. 보름달이 뜬 겨울이었다. 아이는 금빛 쿠션 위에 앉아 있었고, 모자장수의 찻잔은 여전히 깨져 있었다. 그러나 동면 쥐는 깨어 있었다.
⌜겨울이야. 미안함의 겨울이야. 까마귀가 쥐였으면 좋았을 것을.⌟
모자장수는 의자에서 가위를 떼어내 식탁보에 구멍을 뚫었다.
⌜재키가 진심으로 사라지고 싶어 했다면 구멍은 필요 없었을 거야.⌟
모자장수는 식탁 위에 가위를 내려놓으며 노래하듯이 말했다. 물론 모든 옷에는 구멍이 있어야 하기도 하지만.
체셔는 그곳에 없었다. 아이는 체셔가 금빛으로 녹아내려 아예 식탁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까마귀가 있었단다. 그 때 그 아이는 분명 까마귀였어.⌟
동면 쥐는 회색 털로 뒤덮은 고개를 들어 아이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그 애는 까마귀였고, 나는 쥐였는데. 겨울이 와서 내가 잠에 들면 그 애는 혼자가 되는데.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아이는 식탁보를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아이는 피부로 알 수 있었다. 식탁으로 변한 것은 체셔가 아니었다. 식탁 위에 녹아내리듯이 웅크린 동면 쥐의 회색 털 뭉치 같은 머리 속에서는 꿈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면 쥐의 꿈이 몇 번을 반복하고 쥐의 겨울잠이 아무리 길게 이어져도 쥐의 몸은 녹아내리지 않았다.
동면 쥐의 꿈에는 아름다운 가을이 나왔다. 그곳에서 쥐는 낙엽들 사이를 조약돌처럼 누비고 다녔고, 머리 위에서는 언제나 다정한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동면 쥐는 자신이 낙엽을 스칠 때의 소리가 까마귀의 날갯짓 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했고, 까마귀는 비석 위에 앉아 그를 기다리면서 그 비석의 부드러운 회색빛이 동면 쥐의 털 같다고 생각했다.
⌜그 애는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부드럽고 둥근 털의 동면 쥐는 생각했다. 이제 낙엽이 회색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고. 쥐는 더 이상 날개처럼 아름다운 낙엽들 사이를 헤치며 돌아다니지 않았고, 까마귀는 점점 더 날개를 쓰지 않고 비석 위에만 도사리고 앉아 쥐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리 없는 겨울이 오고 있었다.
동면 쥐는 묻기 시작했다. 내가 긴 잠에 들면 까마귀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다투기 시작했다. 동면 쥐는 까마귀를 두 발 달린 날짐승이라고 불렀다. 쥐는 그 순간 가장 더러운 욕을 하는 것 같이 말했다. 날아가, 겨울이 오면 나는 긴 잠에 들어야 해. 까마귀는 그저 발톱으로 비석을 꽉 붙들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어, 몇 년 동안, 답도 없는 질문을 가지고. 내가 그 애를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날짐승도 땅짐승도 아닌 것으로 말이야.⌟
쥐는 까마귀를 뒤로 하고 낙엽을 바스락거리며 깊은 땅속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에서는 까마귀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동면 쥐가 마침내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은 겨울의 한가운데였고, 자신은 생경한 탁자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쥐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자신의 사랑이 그 얼마나 끔찍한 것이고 까마귀의 사랑이 그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사랑은 왜 자신의 까마귀를 네 발 달린 식탁으로 만들었는지.
그래서 겨울은 계속됐고, 쥐는 계속해서 잠을 잤다. 동면 쥐는 생각했다. 겨울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된다면, 언젠가 까마귀는 본성대로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몸을 녹이는 온기가 느껴져 눈을 뜨면 자신은 봄날의 풀밭에 누워 있고 그 애는 훌훌 멀리로 떠나버린 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그 밤빛처럼 새까만 깃털을 보지 못해도 그 애가 날 사랑한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겠지. 웅얼거리는 동면 쥐의 회색 털을 모자장수가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모자장수는 노래를 하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은 악하고(vicious), 약하고(vulnerable), 독하지(virulent).⌟
흥얼거리면서, 모자장수는 의자에서 바늘과 실과, 리본을 떼어내 한 아름을 안아 들었다.
⌜보렴, 재키. 그런데 인간들은 늘 사랑을 좋아하고, 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해. 자기보다 강한 것을 사랑하는 건 당연한 일이거든.⌟
⌜모르겠어요, 무슨 소린지.⌟
⌜맙소사! 티 파티만큼이나 단순한 것을! 들어보렴, 얘야, 인생이 주는 것들은 항상 정확하게 움직이지는 않잖니. 매번 너를 다시 네 욕망 안으로 데려가니까. 매번 같을 수는 없는 거야.⌟
그리고 아이는 더 이상 모자장수에게 묻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답이라기보다 새로운 질문이었고, 손에 들린 두 인형을 볼 때마다 사라져버린 소년이 망령처럼 뇌리를 스쳐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뒤늦게야 자신이 모자장수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거대한 보름달은 이미 나무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깊은 숲속은 춥고 검었다.
⌜우린 어디로 가는 건가요?⌟
⌜또 다른 사랑으로!⌟
아이는 모자장수에게 이끌려 걸으면서 그의 이상스럽게도 크고, 검고, 어둠 속에서 흐르는 듯한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팔에 남은 두 개의 인형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체셔는 인형을 먹어버릴까? 아이는 모자장수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J.L 이에요? 이곳에 있는 모두는 그렇게 다들 이름과 이야기와 사랑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기다리렴, 재키. 헤어지기 전에 네게 주고 싶은 게 있단다.⌟
더 이상 묻지 않는 아이가 더 이상 대답하지 않는 모자장수를 따라 걷다 보면, 겨우 발밑만 비추는 달빛과 함께 무언가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곤 했다. 그것들이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모자라는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한참을 걷다가 나타난 등불 덕분이었다. 등불은 검은 나무에 검은 리본으로 매달려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그곳은 겨울 나무가 기둥이 된 긴 복도 같았다.
모자장수가 멈춰 선 것은 등불이 매달리지 않은 지점이었다.
그곳에는 집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기이한 집이었다. 정면에는 손톱 크기의 문부터 아이의 키만 한 문, 모자장수의 키만 한 문, 숲의 검은 나무들만 한 문, 집 그 자체만 한 문까지 다양한 문과 손잡이가 있었다. 또한 그 집은 작은 크기의 문들을 향해 움푹 파였다가, 큰 문의 위쪽은 우뚝 솟아오르고, 집의 양 옆은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처럼 일그러진 모양이었다. 아이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꼭 마구 구겨놓은 모자 같네!
모자장수는 자신의 모자를 벗어 우아하게 인사하고는 아이의 키와 엇비슷한 문을 열어준 뒤, 자신은 자신에게 맞는 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와 모자장수는 문을 열고 들어가 이리저리 비틀리고 뒤틀린 천장 아래에서 서로 마주 보았다. 안에서 보니 그 집은 퍽 작고, 복도처럼 옆으로 길쭉했다. 통로에는 어떤 가구나 물체도 없었고, 그 끝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집을 밝히는 불빛은 촛불로부터 나오고 있었는데, 양초는 검은색 리본으로 각 문의 오른쪽 천장에 매달려, 허공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천장에는 누군가 밟아놓은 듯 움푹 들어간 곳마다 커다란 고리가 달려 있었다. 그 고리에는 색색의 리본과 실이 늘어져 있었고, 고리와 고리는 또 다른 색실과 리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이는 수많은 색으로 나뉘어 칠해진 천장을 경탄의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곳은 어지럽고, 정신없고, 기이했다.
⌜문이 왜 이렇게 많아요?⌟
⌜고작 이것 가지고 많다니, 재키, 속이 그렇게 좁아선 안 돼! 난 더 만들려고 계획 중이었단다. 집 옆쪽이랑, 뒤에도……문이란 사람이 들어오는 통로인데 사람들 종류가 보통 많은 게 아니잖니? 그래서 문을 여러 개 만드는 거란다. 모든 사람이 들어올 수 있게 말이지.⌟
⌜그냥 아주 큰 문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아요? 그럼 다 들어올 수 있잖아요.⌟
⌜어린 아이야, 크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말이야. 내 문이 아무리 커 봤자 내 집보다 클 수 있겠니! 고작 내 집만 한 문을 만들어놓고 왜 너는 들어오지 못하느냐고 물어서는 안 돼.⌟
아이는 당황해서 입속으로 어물거렸다. 그렇군요. 그래요. 집보다 더 큰 사람도 있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모자장수는 펄쩍 뛰다시피 놀랐다. 맙소사, 재키, 넌 정말로 어린 아이구나. 아주 똑똑해, 그 사실을 이해하다니.
⌜왜 나이가 들수록 더 어리석어지는 걸까? 재키는 그걸 모른단다……나는 재키가 가진 단 하나의 그 커다란 문이 너무 작다고 생각해.⌟
⌜그럼 재키도 이런 집이 있나요?⌟
⌜모든 사람에겐 이런 집이 있지. 모든 사람에게는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이 필요하거든.⌟
그리고 모자장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어둠에 잠긴 통로의 왼쪽 끝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촛불과 문들로부터 멀어질수록 모든 것은 사라져갔고 천장에 매달린 색색의 리본들도 퇴색되어 갔다. 아이는 솔즈베리 성당을 생각했다. 희미한 색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 속을 날아다니는 먼지, 쓸쓸하고 흐린 아침 날의 바깥, 복도를 따라 켜진 촛불, 점점 어둠 속에 잠기어 가는 그 끝에 앉은 이의 실루엣……그 뒤에는 거대한 암흑 속의 나무 십자가. 아이는 그 속에 들어와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촛불은 말이야, 재키, 사랑스러운 것이란다. 촛불은 이해를 바라는 거야. 나는 어두운 사람이라 내 주위를 밝게 할 순 없지만, 당신이 오기를 원한다. 그래서 당신 가까이에는 불을 켜둔다. 그 불빛으로 길을 찾아 어두운 나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내게 오기를 바란다…… 그런 사랑스러운 것이지……알겠니, 재키, 사랑스럽다는 뜻이란다.⌟
아이는 모자장수를 올려다보았으나 그곳에는 어둠뿐 어떤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어둠 속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자장수는 손을 위로 올려 허공을 휘저었다. 그는 불쑥 모자 하나를 끌어 내려 아이에게 씌워주었다. 모자는 아이의 목까지 내려오다시피 할 정도로 컸다. 아이는 모자장수가 문은 그렇게 여러 크기로 만들어두면서 왜 모자는 작게 만들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
⌜난 모자를 좋아한단다.⌟
모자장수가 말했다. 그 목소리가 꼭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소곤거렸고, 한편으로는 들리지 않을 만큼 미약해서 아이는 조금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당신은 모자장수잖아요.⌟
어둠 속에서 짧게 끊기는 모자장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꼭 그런 건 아니야. 내가 모자를 만드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고, 내가 사랑해야 하는 일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지.⌟
모자장수는 손을 내뻗어 암흑 속에서 쇳소리를 내며 문고리를 돌렸다. 그가 문을 열자 아이는 시야를 막는 모자를 한껏 들어 올렸다.
아이의 눈에는 수많은 의자의 옆모습이 보였다. 의자 역시 아주 많은 종류가 있었다. 아이는 금빛으로 빛나는 쿠션으로 뒤덮인 의자로 다가가다가 그 공간 전체에 모호한 은빛이 가라앉아 있음을 알아챘다. 그 빛은 그 수많은 의자 각각 바로 위의 천장에 매달린 수많은 보름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 모든 보름달이 어둡고 은은한 빛으로 그곳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의자가 바라보고 있는 한 곳에는 높은 단이 있었다. 천장으로부터 길게 늘어뜨려져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게 무대에 끌리는 금빛 커튼은 단 위에 벽처럼 서 있었다.
그곳은 무대와 객석과 조명이 있는 극장이었다.
⌜멋지지 않니?(Lunatic, isn’t it?)⌟
아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는 체셔를 찾아보았지만 어디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자신의 옆에 나란히 선 모자장수에 두었다가, 고개를 돌려 무대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자신에 팔에 들린 인형 중 얼굴에 J.L 이라고 적힌 인형을 빼내어 모자장수에게 내밀었다. 모자장수는 빙글 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받아들고는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를 잠깐 지켜보다가 금빛 쿠션이 놓인 의자에 가 앉았다. 아이는 어쩐지 박수를 쳐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연극을 보여주는 거예요?⌟
⌜오, 못할 것도 없지!⌟
모자장수는 무대의 정중앙에 섰다.
아이는 모자장수를 처음으로 보는 기분이었다.
리본이 붕대처럼 둘둘 감긴 그의 모자에, 야윈 듯 우스꽝스럽고 모호한 그 얼굴과 이상스레 빛나는 눈동자, 아무리 봐도 보랏빛인지 검은색인지 알 수 없는 색깔의 옷을 입은 그를.
그리고 아이는 보름달의 어스름한 빛 아래 앉아 무대 위에 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작하길 원하니?⌟
아이는 하나 남은 인형을 손안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네.
아이가 그렇게 대답하자 모자장수는 천장에 매달려 달랑거리던 금빛의 줄을 손에 쥐었다. 그는 그 줄을 가만히 잡은 채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입을 떼었다. 모자장수는 아이가 그를 만난 이후로 가장 힘겹고, 수수께끼 같고, 애달팠고, 행복해 보였다.
⌜재키, 가여운 재키, 오만한 재키, 사랑스러운 재키, 외로운 재키,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인간 속에 살기를 바란단다. 그래서 너를 매번 이곳으로 불러왔어. 재키, 나는 네가 재키를 변화시킬 거라고 믿는다. 체셔는 인간을 증오하고, 혐오하고, 얄팍하다고, 위선적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나는 재키 안에 존재하는 사랑이야. 나는 인간을 사랑해. 그리고 너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단다.⌟
그는 말끝에 줄을 확 잡아당겼다.
커튼이 당겨져 무대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별안간 아이의 머리 위에서 빛을 내던 보름달에서 무언가가 뛰어내려 모자장수를 향해 내달았다.
그것은 체셔였다.
체셔는 그의 꼬리로 모자장수를 휘감고 인형을 덥석 물었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지나치게 크고 무거운 모자가 목으로까지 내려와 시야가 가려졌다. 아이가 모자를 들어 올렸을 때 커튼은 무대의 양 끝까지 열려 있었고, 무대에는 화관을 쓰고 빛나는 흰색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