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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손 May 19. 2024

백열등

소심한 복수

 저녁이 되자 부엌 천정에 달린 하나뿐인 백열등에 불이 켜졌다. 노란 백열등 아래 엄마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궁이에서 나는 매캐한 연기로 부엌은 TV 속 전설의 고향인 듯 앞이 보이지 않았다. 팔을 휘저으며 장난을 치는 은영을 보던 엄마가 부엌문을 열자 부엌에 꽉 차 있던 연기가 순식간에 마당으로 빠져나갔다. 저녁밥을 짓던 무쇠솥 뚜껑이 열리자 구름같이 하얀 김이 올라왔다. 엄마가 무쇠솥에서 밥을 펐다. 은영은 소매를 끌어당겨 뜨거운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안방과 연결된 부엌문으로 옮겼다. 그리고 부엌에서 방으로 방에서 부엌으로 바쁘게 오가며 반찬을 나르고 수저를 놓았다. 할머니는 미동도 없이 엉덩이에 손을 넣은 채 앉아서 은영을 보고 잔소리만 할 뿐이었다. 엄마가 은영을 불렀다.

 “빨리 안 오고 뭐하노. 국 다 퍼 놨는데 빨리 들라라. 국 다 식는다”

 “엄마. 할매는 와 아무것도 안 하고 저래 앉아만 있는데 좀 하면 안 되나 아무것도 안 하고”

엄마 옆에 서서 귓속말하는 은영을 보고 엄마는 조용히 하라는 눈치만 줄 뿐이었다. 부엌문 틀 위에 스테인리스 국그릇이 놓이자 은영이 방으로 가 밥상에 국그릇을 내려놓고 다시 부엌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부엌에 있던 은영이 국그릇을 올려둔 부엌문을 갑자기 세게 닫고 밖으로 나갔다. 방에서 큰소리가 나고 뜨거운 국이 방바닥에 흘렀다. 행주로 국을 닦는 은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화가 난 할머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수돗가로 가 행주를 빨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국그릇을 엎은 은영을 잠시 보더니, 할머니를 향해 큰소리로 역정을 냈다. 수돗가에 있는 은영을 엄마가 부엌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은영의 등짝을 때리며 작은 소리로 혼을 냈다.

 “니 일부로 문 닫은 기제”

 “어. 내가 일부로 국 얹어 놓고 문 닫았다. 나랑 엄마만 일한다 아이가. 설거지도 내가 맨날 하고 할매는 아무것도 안 하잖아”

당돌하게 말하는 은영을 보며 엄마는 아무 말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그날 밤 국그릇은 이제 손대지 말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잠들 때까지 이어졌다. 눈을 감은 은영은 오늘처럼 사고라도 쳐서 엄마와 자신만 하는 집안일을 할머니도 하게 만들겠다는 마음만 커졌다.

 다음날 은영은 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 시키지도 않은 설거지를 하고 걸레로 방과 마루를 닦고 마당을 청소했다. 기다렸다는 듯 빨래가 가득한 세숫대야를 머리 위에 올려주는 할머니는 마치 백설공주에 나오는 마귀할멈 같았다. 지은 죄가 있으니 아무 말도 못 하고 집을 나설 뿐이었다.

강가 빨래터로 가 빨랫돌을 놓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넓은 강가에 조용히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으려니 기운이 빠졌다. 마음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라 얼마나 빨래를 방망이로 내려쳤는지 수건에 구멍이 났다. 또 혼이 날 생각에 빨래는 다 했지만, 집에 갈 수가 없었다. 강가에 있는 강 돌에 빨래를 널었다. 여름 햇볕은 뜨거웠고 달구어진 강 돌에 빨래는 순식간에 말랐다. 빨래를 잘 개켜 다시 세숫대야에 담았다. 그래도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집에 가야 하지만 또 집에 가면 할머니가 심부름을 시킬 게 분명해 망설이고 있었다. 빨랫대야를 안고 강가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 잠깐 잠이 들었지만 이내 서늘한 바람에 깜짝 놀라 잠이 깼다. 해가 지고 있었다. 일 나간 엄마가 돌아오기 전에 쌀을 안쳐놔야 하는데 너무 오래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던 강물이 금방이라도 다가와 덮칠 것처럼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집으로 달려왔지만, 할머니의 잔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집안일도 안 하고 밥만 축낼 꺼믄 나가라. ”

  “나도 친엄마 찾아가고 싶다. 나만 맨날 일 시키고 차별하고 와 나만 일해야 되는데 다른 애들은 일 하나도 안 하고 놀기만 하고 나는 일만 하고 하믄 한다 안 하믄 안 한다. 맨날 뭐라 하고 나도 내일 친엄마 찾아 갈 끼다. 고모도 있고 삼춘도 있는데 맨날 나만 일 시키고”

낮에 한 빨래를 안고 방으로 들어와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서러움이 몰려왔다. 할머니 말처럼 내일은 친엄마를 찾아 나가야 하는데 가지 말라고 잡아줄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일도 하지 않고 밥만 축내는 여자아이는 이 집에서 필요 없을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친엄마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갈 텐데 밤에는 또 어디서 자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때 일 나갔던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자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은영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쌀도 안 씻어 놓고 하루 종일 놀았는 갑네. 쌀이라도 좀 담가 놓던지 뭐 했노?”

 “할매가 빨래해 오라 캐서 빨래했고 청소도 내가 다 했다. 맨날 나만 일 시키노”

은영이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봤다. 아무 말 없이 은영을 보다 방을 나가는 엄마의 등이 그날따라 더 작게 보였다. 부엌으로 따라 나간 은영이 엄마를 향해 수줍게 웃었다. 엄마를 도와 얼른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무쇠솥은 금세 끓어 올랐고 저녁밥은 뜸이 들고 있었다. 부엌문 앞에 앉은 할머니가 얼굴을 찡그린 채 밥과 반찬을 받아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김이 나는 국그릇도 할머니 혼자 직접 받아 날랐다. 평소 같았으면 은영을 불러 시켰겠지만, 할아버지가 지켜보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부엌에서 그 모습을 본 엄마와 은영의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헛기침을 하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겨우 삼키고 있었다. 은영도 친엄마를 찾아 집을 나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어깨가 들썩일 만큼 웃음이 났지만, 또 혼이 날까 봐 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부엌 가득 엄마와 은영의 소리 없는 웃음소리가 백열등을 흔들었다. 할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작아진 엄마의 어깨가 그날 저녁은 조금 펴진 것 같았다. 엄마를 바라보는 은영의 얼굴이 백열등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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