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의손 May 19. 2024

여름 강가

추억은 사라지고 잡초만 남았다.

 뜨거운 여름 아침 할머니가 부산하게 짐을 챙기고 있었다. 모내기를 할 것도 아닌데 챙이 큰 밀짚모자와 수건, 큰 우산까지 꺼내놓고 부엌에서 냄비 속에 무언가를 담기 시작했다. 여름 햇살을 피해 시원한 그늘로 피서를 가는 것 같아 은영의 눈이 반짝였다.

 “할무이 어디 가는데? 나도 가도 되나?”

 “어디 가는 줄 알고! 니는 안될 낀데. 갈라믄 우산이랑 수건 챙기고 긴 옷 입어라. 양말 신고.”

밤마실 갈 때처럼 할머니가 자신을 두고 갈 것 같아 얼른 긴 옷으로 갈아입고 수건을 가져와 목에 걸고 대문 앞에 섰다. 할머니 옆구리에 낀 대야에서 냄비가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좋은 곳으로 가는 줄 알았지만 도착한 곳은 강이었다. 강둑에 서자 은빛으로 빛나는 모래가 끝없이 펼쳐졌다. 여름의 모래밭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햇볕도 모래도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모래밭으로 뛰어가다 발이 뜨거워 뒷걸음을 쳤다. 할머니는 넓은 모래밭에 자리를 잡고 가지고 간 우산을 펼쳤다. 큰 돌을 가져와 우산이 움직이지 않게 손잡이를 눌렀다. 작은 돌도 하나 가져와 수건을 접어 깔고 베개처럼 베고 누었다. 그리고는 모래 속에 다리를 넣었다. 할머니의 얼굴은 금방 땀으로 젖고 있었다. 할머니는 너무 더우면 강물에 다리를 담그거나 세수를 하고 다시 모래에 팔과 다리를 묻었다. 신기하게도 아픈 무릎만 빨갛게 변했다. 은영도 우산을 펼치고 할머니를 따라 했다.

 “은영이 니는 아픈 데 없나? 니는 배가 아프니까 배에다가 모래를 얹어라. 시원하다. 해봐라.”

할머니의 ‘시원하다’라는 말에 모래 위에 누었다. 배와 다리에 수북이 모래를 덮었다. 뜨거운 모래의 열기가 온몸으로 들어왔다. 곧 몸이 익을 것 같았다. 얼굴이 벌게진 채 뜨거움을 참던 은영은 강으로 뛰어들었다. 강물에 몸을 담그고 다시 모래밭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햇볕을 받은 강모래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자 할머니는 모래에서 나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집에서 가져온 냄비에 강물을 퍼와 미역을 넣고 끓였다. 물이 끓자 집에서 만들어 온 밀가루 반죽을 떼서 넣었다. 모래바람에 겨우 피워놓은 불이 연기를 뿜어내며 너풀거렸다. 

 “은영아! 니도 이거 한 그릇 묵어라. 바람 더 불기 전에 묵어야지.”

바람을 등지고 머리에 쓴 수건을 방패 삼아 고개를 숙인 채 할머니와 수제비 미역국을 먹었다. 모래찜질하는 할머니를 두고 은영은 맨발로 뜨거운 모래밭을 뛰어다녔다. 

 밤이 되자 모깃불을 피운 마당에 누워 별을 세면서 강가에 갔던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은영의 옷을 들어 배를 살펴보았다. 빨갛게 익어 있는 배와 발을 만져주는 엄마의 손길에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도 땀을 흘리며 뜨거운 모래밭을 맨발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강가 모래밭에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처럼 색색의 우산들이 은빛 모래밭에 펼쳐졌다. 강가의 뜨거운 모래가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모래가 식을 때까지 아픈 곳을 모래에 파묻고 또 파묻었다. 점심때가 되면 사람들은 불을 지피고 약속이나 한 듯 수제비나 국수를 넣은 미역국을 끓였다. 조용하던 강가가 모래찜질과 물놀이 장소로 소문이 나 사람이 많아지자 할머니는 강으로 모래찜질을 하러 가지 않았다. 

 “할매, 인자 찜질하로 안가 예?”

 “모래찜질을 한번 하고 나믄 사람한테서 나온 독이 며칠이 있어야 빠지는데 사람들이 저리 많이 가니까 인자 텄다!. 내년에 가야지 올해는 안 갈란다.”

강모래를 약으로 생각하는 할머니가 신기하고 사람에게 독이 나온다는 말이 무섭기도 했다. 사람들이 많아지니 동네도 시끄러워져 은영도 강으로 가지 않았다.

 며칠 뒤 온 동네 여자아이들이 모여 강가에서 밥을 해 먹기로 했다. 각자 정한 준비물을 집에서 가지고 강으로 왔다. 모래밭에 준비물들을 꺼냈다. 냄비와 그릇, 칼과 도마 그리고 김치와 양파, 식용유 같은 음식 재료들도 한곳에 모았다. 언니와 함께 온 친구들은 음식을 만들고 언니가 없는 은영만 불 담당이었다.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불이 쉽게 붙지 않았다. 모래밭에 대야를 새워 바람을 막았지만, 사방이 뚫린 야외에서 불을 피우기는 쉽지 않았다. 연기로 눈물 콧물을 쏟고 겨우 불을 살려냈다. 은영은 늘 하는 일이지만 집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만 먹다가 처음 음식을 하는 언니와 친구들이었다. 냄비에 하는 밥은 미리 씻어 불리거나 밥물을 많이 천천히 익혀야 설익지 않지만, 밥을 담당하는 언니는 엄마에게 배워 왔다며 쌀을 불리지도 않고 손등까지 밥물만 잡았다. 부엌일을 많이 해 본 은영이 물을 더 부으려 하자 화를 냈다. 김치전을 만드는 언니와 친구는 프라이팬에 반죽을 급하게 붓는 바람에 김치전이 프라이팬에 들러붙어 울상이 되었다. 감자껍질을 숟가락으로 벗기다 시간이 오래 걸려 칼로 깎았다. 주먹만큼 큰 감자는 작아지고 또 작아졌다. 작아진 감자를 채 썰었지만, 손가락만큼 굵었다. 보다 못한 은영이 감자채를 썰었다. 몇 시간이 지나 겨우 밥이 끓었다. 탄내가 한참이나 나고서야 불을 빼고 뜸을 들였다. 뽀얗던 양은 냄비는 시커멓게 탔고 3층 밥이 되었다. 바닥은 시커멓게 타 밥은 먹을 수 없을 만큼 탄내가 진동했다. 김치전은 형태를 잃은 지 오래고 두꺼운 감자볶음은 아무리 볶아도 익지 않았다. 바람은 심술을 부려 모래를 양념으로 계속 뿌려주었다. 설익은 탄 밥과 모래가 서걱거리는 김치전과 감자볶음을 인원수대로 나누어 자갈밭에 쪼그리고 앉아 먹었다. 결국 탄 밥과 남은 반찬은 강가 잡초밭에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묻었다. 가위바위보로 설거지 당번을 정하는데 언니들과 함께 온 친구들이 걸리면 가위바위보를 다시 했다. 결국 은영이 당첨되어 혼자서 설거지를 해야만 했다. 

 “야! 다시 하자. 왜 나 혼자 설거지 해야 되는데! 이렇게 많은데. 나는 언니도 없어서 도와줄 사람도 없는데”

 “안된다. 진사람 이 하기로 했다. 아이가. 빨리해라”

언니와 함께 온 친구들은 가져온 짐을 챙기기 시작했지만, 은영은 혼자서 설거지를 해야 했다. 서럽지만 없는 언니를 어디서 데려올 수도 없었다. 빨리 설거지를 마치고 짐을 싸야 했다. 등 뒤에서 설거지를 재촉하는 아이들에게 눈을 흘길 뿐이었다.

 아침부터 집을 나와 밥 한 끼 해 먹고 나니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강가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지는 노을을 구경했다. 하늘도 강물도 아이들의 마음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세지며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아이들은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두 떠나 조용해진 강은 바람에 출렁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은빛 모래의 수줍은 반짝거림도 사라지고 철없는 아이들처럼 바람에 실려 나풀거리며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은영은 몇 번이나 머리를 감았지만, 머릿속에서 모래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엄마는 신문지를 깔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겨 주었다. 

 “엄마! 내가 그냥 미역국 끓여 먹자고 했는데 애들이 밥하고 김치전하고 감자도 볶는다 카데. 할 줄도 모르면서. 불도 내가 때고, 설거지도 나 혼자 했다. 쟤들은 밥도 할 줄도 모르데.”

 “그래 맛있드나?”

 “아니. 김치전은 들러붙어 가 숟가락으로 긁어 묵고, 모래가 드가가 서걱거리고. 감자채도 못 썰어가 내가 썰었다. 아이가. 쟤들은 언니라믄서 아무것도 못 하더라.”

 “은영이 니가 살림꾼이라 그렇제”


 몇 년 뒤 태풍으로 다리가 끊어지고 강바닥이 뒤집혔다. 곱던 모래 대신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강 상류에는 땜이 생겨 강물을 가뒀다. 말라가는 강바닥처럼 어린 은영의 추억도 그 자리에 멈추었다. 본가에 가면 강둑에 서서 그날을 추억하는 나를 발견 한다. 출렁이는 강물 소리와 홀린 듯 나에게 다가와 살랑대는 바람만 남아 나를 반기고 있다. 곱게 빛나던 은빛 모래밭도 사라지고 크고 많던 돌들도 없어졌다. 흐르는 강물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면 눈앞에는 모래찜질하는 할머니와 형형색색 우산을 쓴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동네 친구들과 연기를 마시며 밥을 하고 모래 반찬을 씹으며 조잘대는 어린 은영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큰 우산을 쓰고 수건을 목에 두른 할머니가 나를 향해 수제비 미역국을 먹으라 손짓한다. 맑은 날이지만 그날의 그리움과 추억으로 눈앞이 흐려진다. 언젠가 다시 반짝이는 모래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긴다.     

이전 16화 할머니와 친엄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