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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의손 May 19. 2024

할머니와 친엄마

손주보다는 아들

 삼촌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가방을 받아 들고 안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할머니가 그런 은영에게 빨래를 해 오라며 세숫대야에 빨래와 빨랫비누를 담고 등을 떠밀었다.

 “은영이니 깨끗이 빨아와야 된다. 건성으로 빨지 말고 내가 다 검사할 끼다”

입을 삐쭉거리며 마당을 걸어 나오며 뒤를 돌아보자 할머니가 어서 나가라며 손짓을 했다. 냇가에 도착해 빨랫돌을 찾아 궤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가져온 빨래를 냇물에 담그고 빨랫방망이로 힘껏 눌러 분풀이를 했다. 빨래에 비누칠을 하고 빨랫방망이로 사정없이 때려 때를 뺐다. 작은 손을 바쁘게 움직여 냇물에 땟물을 흘려보냈다. 비틀어 짠 빨래를 이고 집으로 돌아와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빨래를 널었다. 하늘에 널린 빨래는 바람에 펄럭이며 말라 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맛있는 과자 냄새가 났다. 앉은뱅이책상에는 빈 과자봉지만 있었다. 할머니가 빨래를 핑계로 삼촌에게만 과자를 준 것이었다. 괜히 서러워진 은영이 할머니를 찾아 과자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할머니는 딴소리만 했다.

 “빨래 다 했으면 마루나 닦아라. 가시나가 하루종일 놀면서 일도 안 하고”

화가 난 은영이 비질을 하며 화난 만큼 먼지를 내고 있었다. 그날 밤 엄마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자 엄마는 아무 말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다음 날 아침 마당에서 아침 준비를 하며 엄마가 할머니께 하소연하고 있었다.

“어무이 와 아를 차별합니꺼. 손자도 같이 좀 주믄 안됩니꺼? 과자 하나 가지고 너무하네예. 그거 안 줄 끼라고 아를 빨래하라고 보냅니꺼”

“니 지금 시어머니한테 대드나? 니가 봤나? 은영이 저기 거짓말 하는 기믄 어짤 낀데 그라고 내가 내 자식 과자 한 봉지도 못 주나?”

할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아침부터 큰소리를 낸다며 호통을 쳤다. 엄마가 뒷밭에서 눈물을 훔치며 파를 뽑고 있었다. 엄마를 따라 나온 은영도 울면서 파를 뽑았다. 자신 때문에 아침부터 혼난 엄마가 불쌍하고 미안했다.

 며칠 뒤 엄마가 조용히 은영을 불렀다. 엄마의 몸빼 바지 안에서 과자 한 봉지가 나왔다. 은영의 눈이 커졌다.

 “이거 니 혼자 다 묵어라. 다른 아들은 주지 말고 알긋나?”

 “할매가 알믄 나 또 혼날 낀데. 동생들 안 챙긴다고 뭐라 카믄서 또 혼낼 낀데 진짜 나 혼자 묵어도 되나?”

엄마는 은영을 안심시키며 뒤란으로 손을 잡아끌었다. 신이 난 은영이 뒤란 구석에 앉아 과자봉지를 뜯었다. 솜사탕 같은 하얀 구름이 입속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학교를 마친 삼촌이 자전거를 타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할머니가 치마에 초록색 병을 감싸고 방으로 들어갔다. 은영도 할머니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방문을 닫고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은영도 지지 않고 문고리를 흔들었다. 할머니가 방 밖으로 나오며 실눈을 떴다.

 “가시나가 무신 힘이 그리 세노? 느그 삼촌 공부한다. 방에 드가지 마라 알긋나”

할머니가 사라지자 은영이 방으로 들어갔다. 놀란 삼촌이 사이다를 마시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 삼촌이 한 모금 남짓 남은 사이다병을 은영에게 건넸다. 달달하고 톡 쏘는 사이다는 소풍날이나 먹을 수 있었다. 한 번에 삼키기 아까워 최대한 오래 머금고 싶었지만, 입안이 따가워 어쩔 수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쉬움에 사이다병으로 나발을 불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빈 사이다병을 들고 부엌으로 가 찬장 안에 있던 사카린을 몇 개 넣었다. 펌프로 물을 퍼 올려 빈 사이다병에 채우고 흔들었다. 마루에 앉아 사이다 향이 나는 단물을 마시자 입안에서 달달한 구름이 지나갔다. 밭에 갔던 할머니가 마당으로 들어오며 은영을 보자 달려와 손에 든 사이다병을 낚아채며 무섭게 말했다.

 “삼춘 공부한다고 준 사이다를 니가 와 묵고 있노? 삼춘 몰래 훔친 기가!”

 “할무이가 한번 묵어 보이소. 진짜 사이단가 아닌가? 빨리 묵어 보이소”

놀란 은영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할머니가 사이다병을 입에 가져다 대자 얼굴이 일그러졌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은영에게 다시 사이다병을 쥐여주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 할머니와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조잘댔다. 손자보다 자식이 더 중요하고 막내아들이니 더 소중한 것 같다고 하며 처음 시집왔을 때 코를 흘리며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서 있었다던 삼촌 이야기가 더 듣고 싶었지만,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들리지 않았다. 그날은 구름 위를 뛰어다니며 입안 가득 목구멍 따갑게 사이다를 마시는 꿈을 꾸었다.

  “으이구 이 가시나야. 니 자꾸 이리할래? 진짜 니 친엄마한테 보내야 되겠다. 맨날 이리 일만 만들고 한 번만 더 이라믄 진짜 니 친엄마한테 보낼 끼다. 니 친엄마 장날에 보니까 저기 다리 밑에 있더라.”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던 엄마가 화를 내며 새까맣게 곰팡이가 생긴 쌀 덩어리를 되박으로 퍼내고 있었다. 며칠 전 뒤주 위에 두었던 사이다병이 넘어진 일이 생각났다. 바로 물을 닦았지만, 뒤주 안은 확인하지 않았었다. 풀이 죽은 은영이 되박을 받아 뒷밭으로 갔다. 곰팡이가 생긴 쌀을 흙으로 덮고 밟았다. 그때 친엄마를 찾으면 구박받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으며 친엄마가 정확히 어느 다리에 있는지 물어봤지만, 식구들은 웃을 뿐이었다. 엄마는 옷 보따리는 벌써 싸놨다며 꼭 가지고 나가라고 했다. 그날 밤 친엄마를 찾을 생각에 들떠 잠이든 은영의 꿈속에서 곰팡이가 까맣게 핀 옷을 입은 시꺼먼 사람이 다리 밑에서 걸어 나와 은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꿈속에서 손을 휘저으며 못 간다고 잠꼬대를 하는 은영의 손을 엄마가 가만히 잡아주며 말했다.

 “가기는 어디 가노 우리 은영이. 엄마랑 살아야지 내 새낀데.”

흐느끼던 은영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번졌다. 달빛도 조용히 강가의 다리를 비추고 있었다. 새침한 바람만 지나갈 뿐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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