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지만 반갑지 않은 사람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by 신의손

결국 또 나는 다른 공부를 하고 있었다. 대충본시험이 붙을 수 없었고 두 번째 시험도 집안사정으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2000년대를 사는 내가 휴대폰 불빛으로 공부를 했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나 그건 사실이다. 전기가 끊긴 것도 아니고 스탠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울면서 공부를 했고 나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러나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인생이기 때문에 포기가 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공부를 하고 밥을 차리고 집 앞에 있는 맥도널드에 와서 귀마개로 귀를 막고 공부를 했다. 아침에 2층 매장은 아무도 없었지만 스피커 소리는 귀가 찢어질 정도로 컸다. 도망 나와 공부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또 하나의 국가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었다.


2015년부터 면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언제 적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떻게든 적어내야만 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쓰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는 취업 생각을 접을 만큼 나를 고뇌하게 만들었다. 이력서야 그간에 취득한 자격증으로 채우면 되지만 자기소개서는 너무나도 생소했다. 동아리활동도 없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고 주체적으로 무얼 할 수 없던 시대에 사회생활을 하다가 결혼 후 아줌마로 살아온 내가 그 칸들을 다 채울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다 채워야만 했다. 이 산을 넘어야 다른 산을 또 넘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말 가느다란 나무젓가락 같은 사실에 과장된 소시지를 끼우고 픽션과 소설의 중간 같은 반죽을 입히고 전혀 티 나지 않을 만큼의 빵가루를 입혀 새 기름에 튀겨내야 했다. 그렇게 따끈한 핫도그를 만들어 내 잘 진열해야만 했다. 그렇게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최단시간 내에 만들어 내야만 했다.


보통 면접에도 시즌이 있다. 공공기관의 계약직은 빠르면 2월, 아무리 늦어도 3월에는 예산이 집행되기 때문에 전년도 10월부터 공고가 뜬다. 서류 통과가 되면 면접을 보러 다닌다. 구인 인원의 3 배수나 많게는 5 배수까지 면접을 보러 온다. 20~30명 정도의 인원이 회의실에서 대기를 하는데 남자보다는 여자가 많고 또 몇 군데를 돌다 보면 만나는 사람은 계속 만나게 된다. 처음 만났을 때는 가벼운 눈인사로 시작하지만 발표가 나고 다른 곳에 지원해 면접을 보러 가서 또 만나면 그냥 웃게 된다. 나도 그랬다. 두 번째 만남에서 웃었고 세 번째 만나면 통성명과 전화번호를 교환하자 했었다. 일자리는 한정적이고 절실한 사람은 많으니 웃고 있어도 그 마음은 타들어 갔다.


2016년 10월이었다. 구청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같이 면접을 보러 다니다 눈인사와 웃음과 통성명까지 한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연락이 왔다.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며 출근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해당부서의 주무관을 통해 출근해서 계약서를 쓰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2016년 11월부터 나의 직장생활이 시작되었다. 비록 2개월짜리 계약직이었지만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출근을 하다니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 아이들도 운동화 대신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나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동네 아줌마들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그 2개월 계약직 자리는 나와 같이 면접을 봤던 선생님이 더 좋은 자리로 이직을 하면서 공백이 갑자기 생겼고 경력자들은 2개월짜리는 서류가 지저분해진다는 이유로 거절을 하였고 그 차례가 마지막에 있던 나에게 까지 온 것이었다. 기회 일 수도 있었지만 다음 해 계약직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지원 조건이 구직자이지만 취업 중에는 서류제출을 할 수가 없었다. 공고가 나면 12월에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본다. 그러나 나는 12월 31일까지 계약기간이라 중도 퇴사를 하고 지원하더라도 재계약은 힘들 것이 당연했다. 구청과장이라는 사람도 계약서를 쓰고 인사를 하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커피를 마시며 다른 좋은데 지원해서 가라고 무슨 일회용품 보듯 말을 했다. 공무원이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그날 알았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2개월짜리 소모품취급을 받아도 나는 아침에 출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 그 2개월 동안 실적도 올리고 안면이 있던 여러 선생님들과도 어울리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도 계약기간이 끝나가 내 일자리도 못 알아보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일자리를 알선하고 전화를 해야 했다. 그게 직업상담사의 일이니까. 공무원 철밥통을 들먹이며 이력서를 300통 넘게 섰는데 몇 년째 무직이라고 전화를 걸어 화를 내고 욕을 하는 사람에게 나도 다음 주에는 계약해지라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이라고 생각하니 참아졌다. 그게 끝이었다. 여러 군데 이력서를 넣었지만 2개월짜리 초보에게는 특히 아줌마에게는 기회가 잘 오지 않는다. 아이가 어려 아프면 병원에도 데리고 가야 하고 제사가 있으면 야근도 못하니 더더욱 힘들다.


꿈같은 2개월이 지나가고 마지막날이 되었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서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력서를 다시 재정비하고 2개월 경력도 경력이라고 한 줄 채웠다. 여러 가지 버전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5~6가지 준비를 해 USB에 넣고 인쇄도 해서 가지고 다녔었다. 그렇게 2017년 1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구직의 시즌도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한 군데만 남기고 나는 면접에서 떨어지거나 서류전형에서 떨어진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거의 포기를 했을 때 마지막 한 군데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가는 길에 같이 근무했던 선생님이 동행을 해주었다. 내가 면접이 끝날 때까지 추위를 견디며 건물 밖에서 대기해 가며 나에게 힘을 실어 주었지만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이곳이 마지막인데 한겨울 밖에서 떨며 기다려준 선생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예산집행이 늦어져 출근이 당장 다음 주 부터고 합격자 발표도 면접 후 2시간 후라 긴장을 했는지 입고 간 원피스를 벗지도 못하고 쇼파에 쓰러져 있는데 휴대 폰이 울렸다. 그렇게 나는 2개월 경력으로 11개월짜리 계약직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이전 09화빨리 취직이 될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