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처음부터 없었다

박노수 미술관 뒤뜰에서 묻다, 권력의 품격이란 무엇인가

by 유수연

한양 아방궁, 흔적없이 사라진 일장춘몽


서촌 옥인동 하늘 밑, 이제는 흔적조차 희미한 '벽수산장(碧樹山莊)' 가는 길이 있다.


이곳은 ‘매국노 중의 매국노’라 불리는 윤덕영이 20년 공사 끝에 완공한 프랑스풍 르네상스 별장이었다. 당시 규모가 축구장의 8배에 달했고, 연못에서 뱃놀이가 가능했을 정도라니 사람들은 이곳을 ‘한양의 아방궁’이라 불렀다. 구한말 고관대작들의 마차와 가마가 쉴 새 없이 드나들었을 이곳을, 지금은 기억하는 이도 찾는 이도 거의 없다. 그야말로 흔적 없이 사라진 일장춘몽이다.


낡은 연립주택 사이로 몸통 없는 건물의 기단과 머릿돌, 그리고 초라한 기둥 하나만이 이곳이 식민 시대 화려했던 권력의 입구였음을 외롭게 증언하고 있다. 흔한 안내판 하나 없는 그 길을 네이버와 구글 지도에 의지해 따라가 본다.


엇박자의 한옥, 탐욕이 머물던 자리


언덕을 5분쯤 오르자 사연 많은 한옥 한 채가 나타난다. 한때 순정효황후(윤비)의 생가로 잘못 알려져 민속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으나, 실상은 윤덕영의 소실이 살던 곳임이 밝혀져 지정 20년 만에 철회된 곳이다.

집으로 오르는 계단과 기둥 양식은 일본식인데 몸체는 한옥이다. 이 기묘한 '언밸런스'가 묘한 거부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한다. 양반집 첩의 거처였다는 선입견 때문일까, 안채의 공기는 유난히 내밀해 보인다.

저 방과 마당에서는 어떤 모의가 오갔을까. 주인의 위세를 빌려 민중 위에 군림했을 종들과 하녀들의 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간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집의 모양새다. 조선 왕조가 망하며 일자리를 잃은 궁궐 도편수들을 불러 지었다는 이 집은, 민가치고는 과하게 웅장한 기둥과 지붕을 이고 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폐허처럼 방치된 모습이 조선의 흑역사를 말해주는 듯 하다.


치맛자락 속의 옥새, 그리고 예정된 몰락


윤덕영은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라는 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패악을 일삼았다. 일본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친일파였던 그는, 조카딸인 황후의 치맛자락 속에 숨긴 옥새를 강제로 빼앗아 합방 문서에 찍게 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시간 앞에서 영원한 것은 없었다. 수탈과 착취로 쌓아 올린 부귀영화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들은 요절했고 집안은 절손되었다. 해방 전 일본 회사에 팔려 나갔던 벽수산장은 박헌영의 집무실, UN군 사무실로 쓰이다 1966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1973년 도로 정비 사업으로 완전히 철거되었다.


그야말로 한 편의 대하드라마 같은 허무한 말로였다. 그리고, 벽수산성은 이제 기록 속 사진만이 남았다. 1929년, 올망졸망한 초가집들을 기괴하게 내려다보던 유럽풍 고성(古城)의 오만한 모습만이 그 시절을 증언할 뿐이다.

자료: 서울역사박물관

'윤덕영 딸의 집'에서 '박노수 미술관'으로


근처에는 윤덕영이 딸 부부를 위해 지어준 2층 양옥집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집은 1973년 박노수 화백이 구입해 거주하다 종로구에 기증하면서, 현재는 '박노수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따뜻하고 단아한 서양식 벽난로와 박공지붕이 어우러진 이 아름다운 집의 뒤뜰 벤치에 앉아본다. "윤덕영도 자신의 딸만큼은 진정 행복하길 바랐겠지?" 딸을 향한 부정(父情)조차 매국의 역사와 뒤섞여 허무한 바람으로 스쳐 간다.


서촌의 겨울 하늘에 흩날리는 질문


서촌은 묘한 곳이다.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자 중인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며, 윤동주와 이상 같은 문인들이 암울한 시대를 견뎌낸 곳이다. 누군가에게는 화려한 추억이었겠지만, 대다수 민중에게는 끔찍한 악몽이었을 시간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 권력과 명예를 가진 자들에게 이 당연한 측은지심이 결여될 때 국가가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 서촌의 골목은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런 사연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 외국인 무명 아티스트의 노랫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진다.

흥겨운 리듬 위로 서촌의 겨울 하늘에 눈발이 흩날리며 벽수산장의 남은 이야기마저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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