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을 찾아 떠난 설국 여행기, 그리고 현실로의 귀환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눈이 내리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소설 <설국>의 한 장면이다.
이제는 환상 같은 고전의 세계. 백색의 눈 덮인 산골, 조용한 밤하늘 아래 별을 바라보며 마시는 따뜻한 정종
한 잔…. 그 로망 하나를 품고, 이 추위에 무슨 눈 구경이냐며 아연실색하는 남편을 설득해 기어이 치토세 공항에 도착했다.
그날 삿포로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것은 평생 보아온 눈 중 단연 최고의 ‘설국’이었다. ‘차갑고 고요한 풍경’이라는 평범한 말로는 부족하다.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인 끝없는 벌판은 어릴 적 본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듯 막막하기만 했다.
그리움이 쏟아지다 얼어붙은 듯한 상고대와 삭풍 속에 버티고 선 하얀 가문비나무들. 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평생 도시에 살던 이가 상상해 온 ‘눈’의 실체가 얼마나 빈약한 것이었는지 실감해야 했다.
닝구르마을, 흰 수염 계곡, 푸른 연못…. 지역 이름마저 동화 속 요정 같지만, 그 적막함 속에는 이방인이 차마 다 헤아리지 못할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초특급 재난 수준의 폭설이 내리는데도 이곳에선 차가 다니고 사람이 산다.
주요 도로에는 열선을 깔아 눈을 녹이지만, 나머지는 그저 쓸어서 길가에 쌓아둔다. 그 눈더미가 마치 하얀 성벽처럼 치솟아 있다.
건물 창마다 X자형으로 창을 막아 놓은 모습이 생소했는데, 쌓인 눈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 한다.
이 눈들은 6월이 되어야 저절로 녹는데, 그때까지 여름의 천연 쿨러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관리를 못 하면 검게 썩어버린다. 이를 처리하는 예산만 연간 백억 엔 이상이라니, 낭만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현실의 숫자들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이 거칠고 삭막한 원시의 땅의 원주민은 아이누족이다. 본토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강제로 개척하며 만들어진 도시, 삿포로. 그래서일까, 이곳 사람들은 외로움에 강하고 혼자에 익숙해 보인다. 실제로 북해도의 이혼율은 일본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고, 혼인율은 낮다. 가족제도에 대한 인식이 낮고 독신율이 높다는 통계는, 이 하얀 적막 속에서 각자가 견뎌내야 할 고독의 크기를 짐작게 한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온기가 그리웠겠지. 전통 가옥 중심에 있는 마을극장에서 실없는 만담공연을 보며, 눈 내리는 밤 화로 곁에 오밀조밀 앉아 소박한 공연을 즐겼을 옛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화재를 알리는 종 ‘마토이’와 마을을 지키는 검은색 경계 탑들. 온 사방이 하얗기에 오히려 건물과 탑들은 더 짙은 검은색을 띠고 있다. 그 선명한 대비 속에서 옛 마을의 느긋함과 정취가 묘하게 교차한다.
젊은 사람들의 활기로 생동감이 넘치는 삿포로 도심에는 일본어보다 한국어가 더 많이 들려온다.
폭신한 침대 같은 눈 위에 벌렁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눈이 펑펑 내리는 밤 노천온천의 추억은 잊을 수 없다.
활활 타오르는 페치카 앞에서 창밖 설경을 바라보며 북해도의 성찬을 즐기는 시간.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순간들이다.
하지만 3박 4일 정도 지나자, 그 신비로움도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현실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어느 순간부터는 이 아름다운 풍경이 '추위'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공짜로 살라고 해도 단숨에 거절할 것 같은 마음. 폭설이 가끔 내려주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주는 ‘내 나라, 내 집’의 풍경이 감사하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던 눈의 세계를 떠올려 본다.
잊지 못할 ‘극한의 아름다움’이었지만, 동시에 ‘찰나로 스쳐 가서 다행’이다.
영원할 것 같던 그 백색의 공간을 뒤로하고 익숙한 우리 동네로 돌아오는 길, 비로소 안도의 숨이 쉬어진다.
남편이 또 가고 싶은지 묻는다.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다”라고 대답은 했지만, 당분간 제 인생의 눈은 삿포로에서 다 본 것 같다.
순간의 환상으로 남겨두었기에 더 찬란했을지도 모르는 곳. 사요나라, 삿포로!
여러분이 꿈꾸는 '설국'은 어떤 모습인가요? 가끔은 닿을 수 없는 먼 곳의 환상이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비현실적인 아름다움 속에 머물고 싶다가도, 결국 소박한 나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안도감. 여러분도 여행의 끝에서 이런 '다행스러운 작별'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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