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산책] 만천명월의 꿈, 만인의 경복궁 되다

콘크리트 벽에 갇혔던 식민의 상처에서 BTS의 무대가 되기까지

by 유수연

“우리 궁궐 여행이나 해볼까?”


경복궁, 창덕궁, 청와대…. 집에서 버스를 타면 1시간 이내의 거리. 맘만 먹으면 산책하는 기분으로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언제 가보았는지 기억에 아슴푸레할 정도다.


특히, 광화문, 세종로는 조선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고, 불과 얼마 전까지 ‘문안에 사는 사람들은 문밖에 사는 사람들과 분명한 차별이 있음’을 공공연히 말할 정도로 콧대 높은 곳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삼청동길, 인사동, 종로, 덕수궁 포함해서 곳곳에 추억이 서려 있는 곳이었는데.... 날씨도 좋고 명절은 무료라니, 원데이 여행코스로 ‘딱’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길을 나서본다.


개인적으로 궁에 대한 첫 기억은 아주 어릴 때 창경원에서의 동물 구경과 벚꽃놀이, 경복궁의 경회루에서의 사생대회였다. 당시는 궁궐이라는 개념 같은 것은 없었고, 그저 김밥 먹고 놀다 오는 좀 특별한 유원지라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20대의 어느 해인가 광화문 중앙청사를 국립박물관으로 개조한다며, 중앙청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했을 때가 있었다. 그때 박물관 어느 복도 창 너머 보였던 경복궁의 모습은 좀 충격적이었다.


광화문과 근정전까지 보였던 경복궁은 거대한 벽과 같은 중앙청 건물에 완전히 제압된 모습으로 너무 비루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5년 이전, 1990년대 초(미상) 광화문 광장


임금과 궁궐의 멱살을 잡고 위협하듯 콘크리트 건물을 바짝 붙여 놓은 모습. 조선인들의 기를 완전히 꺾고 숨도 못 쉬게 가두어 놓은 모양새 그 자체였다. 아예 작정하고 지어 놓은 거다. 물론, 여기에는 경복궁이 백성들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인 계산과 조선왕조의 혈맥을 끊겠다는 풍수적 의미가 섬뜩하다.


지금은 개개의 궁들이 산재해 있지만 예전에 조선의 궁궐터는 경복궁과 동십자각 예전 미국대사관 부지에서 창덕궁, 창경궁, 종묘까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일제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토막이 나 도로가 되고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등, 옛날 사람들이 보았으면 땅을 치고 숨넘어갈 모습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물론, 패망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왕이고 뭐고 정신없이 스스로 목숨 부지하면서 겨우겨우 삶을 이어 왔는데, 왕실에 대한 이런저런 법도가 무엇이며, 권위와 금기 같은 것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그런데, 요즘 경복궁은 밝고 환해졌다. 때깔 곱게 완전 리뉴얼 된 모습으로, 그 옛날, 이 땅을 살다 간 사람들의 영광과 오욕, 민족적 충격과 상처를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던 경복궁은 오가는 관광객들의 국적 불명 한복 체험 세트장이 되어 버렸다. 밤이면, 디지털 미디어 아트로 현란한 경복궁 광화문 광장 앞.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는 말 그대로 실감 난다.


창덕궁은 가장 오랫동안 실질적인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왕의 안채와 같은 곳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조경이 일품인 궁궐의 계단을 오르면 왕의 옥좌가 있고 별세상이 펼쳐진다.


왕의 용안 뵙기가 그리 힘들고 그 말 한마디에 죽고 시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조아리는 마음 하늘 같다는 것이 백성들의 심정이었을 텐데, 창덕궁 후원 존덕정(尊德亭)에 걸려 있는 현판 글 하나가 눈에 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내용을 대충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뭇 개울들이 달을 받아 빛나고 있지만 하늘에 있는 달은 오직 하나뿐이다. 내가 바로 그달이요 너희들은 개울이다. 그러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에 합당한 일" 아니겠...... 니?


21세기를 사는 인간이 듣기에는 '자다가 개 풀 뜯어먹는' 소리쯤으로 들리는데, 막상 정조는 이 글귀가 너무 좋았는지 전각마다 필사해서 붙여 놓으라고 했다 한다. 그것도 다 소실되고 딱 하나만 남아있다니. 서슬 퍼렜던 그 권력도 정치사상도 다 무상하다.


최대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물아일체를 꿈꾸던 왕의 숨겨진 정원 물 위에 떠 있는 전각, 각각의 의미를 담은 현판들. 수령 깊은 나무들….


늘 그렇지만 ‘마음에 담아두면 모든 것이 생겨나고 마음에서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니, 마음에서 모든 것이 멸해지면 닿는 곳마다 극락’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그렇게 부질없을지라도 영원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이란 다 그런 것. 주인 없는 궁궐과 그 터들과 이야기들은 오늘도 묵묵히 '십 년 가는 권력은 없고, 열흘 붉은 꽃은 없다’(권불십년 화무십일홍, 權不十年 花無十日紅 )를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 보이는 인왕산. 그 아래 궁궐들과 이 나라의 번영을 상징하는 굵직굵직한 건물들.


문득 거리의 불빛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갖가지 유산과 유물들.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꿈속에서 또 다른 미래를 찾는다는 이 현실은 얼마나 평화로운 것인지….


돌아보면 어디든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큰 대궐 작은 대궐 맘만 먹으면 언제든 드나들 수 있으며 오래된 맛집에서 맛있는 밥과 고기를 먹고 분위기 있는 재즈를 들으며 정담을 나눌 수 있는 내 고향 서울.


실컷 걷고 사진 찍었으니, 저녁 코스는 가게 이름도 무시무시한 뼈탄집.

분위기에 취해 또 한잔. 술 마시고 고기 먹고 나니, 경복궁도 의미 없고, 청와대도 의미 없어진다.


조상님들은 다시 못 올 흘러간 시간들을 아쉽고 또 아쉬워할까?


한때는 온 세상 위에서 군림했지만, 이제는 일상이 되어 사람들로 북적이는 궁궐들.


여기에 한술 더 떠, 이제는 BTS 같은 세계적인 가수들이 궁궐 앞마당에서 공연을 펼친단다.

고즈넉한 정취 대신 현란한 조명과 스피커를 찢는 음악 소리가 궁궐의 담장을 넘을 것이다.


서슬 퍼런 법도가 지배하던 이곳에 울려 퍼지는 21세기의 리듬이라니. 기다려지고 또 기다려진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시간은 또 오는 것.


어느 것은 포장되고 어느 것은 왜곡되어도, 역사는 후손에 의해 다시 만들어지기도 하고 허물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역사상 가장 유복한 후손들로 인해 오늘도 궁궐은 전 세계 손님들이 바글바글하니, 부디 조상님께서도 함께 즐겨 주시길.




#경복궁 #궁궐 #서울여행#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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