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 모자와 중세의 갑옷 — 불안을 수호하는 법

다시 '갑옷'을 입어야 하는 시대에게

by 유수연

밀리터리가 돌아왔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서울패션위크 런웨이 사진들을 보다 문득 묘한 기시감이 스쳤다.


당시엔 그저 '멋진 복고'라 생각했던 견장과 금속 버튼 등의 밀리터리 요소들이, 며칠 사이 급변한 국제 정세와 맞물려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중동의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의 포성이 일상이 된 지금, 런웨이의 밀리터리 룩은 이제 트렌드를 넘어 나를 지켜주는 '생존의 갑옷'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High-End: 90년대 스크랩북에서 꺼낸 예언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낡은 스크랩북에는 30년 전 패션계가 보냈던 서늘한 신호들이 가득하다.


1995년의 랄프 로렌은 중세 기사를 연상시키는 메탈릭 한 갑옷 디자인을 선보였고, 1996년 미우치아 프라다는 군용 나일론 소재를 극도로 슬림하게 재단한 '슬림한 군복'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밀리터리 룩이 한창 컬렉션무대를 장악했을 당시는 보스니아 내전, 제 1차체첸 전쟁, 미국내 테러전 등 전세계적으로 풍요와 불안이 교차하던 시기였다.

당시 프라다 모델들은 표정이 없었다.


창백한 얼굴로 전쟁터 같은 도시를 홀로 건너는 '고독한 정찰병' 같았던 그들의 실루엣은, 감정을 절제한 채 당당하게 독립하려는 현대 여성의 페르소나 그 자체였다.


평화 속에서도 전쟁의 형식을 빌려와 '용감한 로맨티시즘'을 구사했던 90년대의 기록은, 묘하게도 2026년의 오늘과 겹쳐진다. 밀리터리가 어느새 돌아 온 것이다.


Low-Fi: 2026년, '방패'를 머리에 얹고 걷다

장광효 (CARURO) 2026FW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전장에서도 시를 읊을 것 같은 낭만적 장교의 우아한 예복 같은 CARUSO 2026 F/W 서울패션위크


막스마라 그레이트 코트


30년 전의 그 하이엔드적 파격은 이제 우리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번 시즌 장광효(카루소)의 런웨이에 등장한 얼굴을 가린 '방패 모자'는, 30년 전 랄프 로렌이 예언했던 '갑옷'이 2026년의 방식으로 부활한 모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방패'의 진화다.


95년의 갑옷이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려던 단단한 결의였다면, 지금 우리가 가볍게 눌러쓰는 랄프 로렌의 '실드(Shield) 로고' 캡은 그 웅장했던 방패가 우리네 일상의 가장 친숙한 유니폼으로 내려앉은 로우 파이(Low-Fi)적 '위로'다.


30년전 컬렉션에 올라왔던 중세의 문장은 누구나 가볍게 눌러쓰는 랄프 로렌의 '실드 로고' 모자로 사랑받고 있다. 폴로 랄프 로렌 크레스트 실드 MCMLXVII 블루 레더


유행이라는 이름의 심리적 요새


패션은 불안한 시대에 언제나

옷이 단순한 장식이 아닌, 나를 지켜주는 '심리적 요새'가 되길 원한다.


95년도의 프라다는 전쟁의 불안함을 무표정과 군더더기를 다 떼어버린 슬림한 여전사룩이었다면, 막스마라는 이번 시즌 '카슈미르 갑옷'으로 무장했다.


각진 어깨와 중량감 있는 실루엣은 도시라는 전장에서 사령관의 품격을 지켜주는 든든한 성벽을 연출하는 것이다.


95년 프라다의 여전사 룩이든, 2026년 막스마라의 카슈미르 갑옷이든, 결국 밀리터리 룩이란 세상이 거칠어질수록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나 견고하게 사랑하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정직한 증거다.


30년 전 기사가 말했듯, 암울한 시대의 서바이브 웨어를 꺼내 입는 것이 '정신적 사치'라면 기꺼이 그 사치를 누리고 싶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도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가장 세련된 방식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막스마라가 사령관의 코트라면, 디자이너 강대헌의 에드리엘로스는 참호 속에서도 끝내 자아를 잃지 않는 전사의 펑크 정신이다. ADRIEL LOS 2026 F/W 컬렉션

[작가의 말]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늘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그 불안을 '스타일'로 승화시킬 때 우리는 비로소 두려움을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일상이라는 전장에 나서며 선택한 가장 '세련된 방패'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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