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不在)의 현존, 패션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철사 뼈대 위 비어있는 공간, 상상을 입히다; 금기숙특별기증 전

by 유수연

패션이 비즈니스인가, 아트인가를 두고 학계와 현장이 치열하게 격돌하던 시절이 있었다.


옷은 결국 팔려야 하는 상품이라는 '산업적 논리'와, 신체를 매개로 한 조형 예술이라는 '미학적 가치'가 팽팽하게 맞서던 그 뜨거웠던 시절로부터 어느덧 30년이 흘렀다.


팽팽했던 '장르의 경계' 세우기로 정립될 ​당시의 대립은 패션의 '목적성'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던 것 같다.


​비즈니스 진영 (산업계)는 "옷은 결국 입혀져야 하고 팔려야 한다. 며 " 패션을 철저히 상업적인 도구이자 경제적 가치 창출의 수단으로 보았다. 샤넬이나 에르메스 같은 럭셔리 하우스도 결국 '매출'로 증명해야 한다는 현실론이다.


반면 ​아트 진영 (학계/전위적 디자이너)들은 옷은 신체를 매개로 한 조형 예술임을 주장했다.

" 안토니오 로페즈, 알렉산더 맥퀸, 레이 가와쿠보 같은 작가들은 런웨이를 퍼포먼스 아트의 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결국, 입을 수 있느냐보다, 어떤 '메시지'와 '미학'을 던지느냐가 핵심이었던 것이다.


"둘 중 무엇인가?"라는 이분법적 질문 자체가 구시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지금.


이제 패션은 '아트로써 권위를 얻고, 비즈니스로 생존하는' 고도의 전략적 공생 관계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명품 브랜드들이 미술관을 짓고(루이뷔통 재단 등), 현대 미술가와 협업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제품에 '예술적 가치'를 덧입혀 가격 저항력을 없애고 브랜드의 급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처럼, 비즈니스가 아트를 도구로 사용하는 시대.

​패션의 아카이브는 이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는 패션이 단순히 한 시즌 소모되는 소모품이 아니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입을 수 없는 옷(Digital Fashion)'이 NFT 형태로 팔리기도 하는 요즘.


실용성이 완전히 제거된 '순수 예술'로서의 패션이 디지털 공간에서 비즈니스로 성립되는 기묘한 지점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아무튼 ​과거의 논쟁이 '정체성 찾기'였다면, 어제 공예박물관서 폐막된 금기숙의 특별전은 "패션이 아트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한다.


모든 것이 효율성과 상업성으로 점철된 시대에, 인간의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실험적 크리에이터'들이 없다면 패션은 그저 '의류 산업'에 머물고 말 테니까.



​서울공예박물관에서 만난 금기숙의 특별전 <입고 싶은 예술, 옷>은 우리에게 패션이 왜 여전히 '아트'여야 하는지, 왜 실험적 크리에이터들이 존재해야만 하는지를 가장 확실하고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보여줬다.

​차가운 철사의 뼈대가 비즈와 빨대 조각 같은 일상의 오브제들을 품고 피어나는 찬란한 실루엣.


금속 공예의 견고한 물성(Materiality)과 패션의 유연한 포름(Form)의 완벽한 랑데부.

​가장 경이로운 지점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워둔 '네거티브 스페이스(여백)'의 그림자와의 조화.


옷의 면(面)은 생략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텅 빈 공간 위로 실물보다 더 생생한 패션의 컬러를 느낀다.


강렬한 조명 아래 펼쳐지는 '키아로스쿠로(명암대비)'의 유희 속에서,

옷은 더 이상 입는 도구가 아니라

영혼의 형상투사가 된 것이다.

철사 뼈대와 뼈대 사이로 스며든 빛과 그 뒤에 맺힌 그림자는 속삭인다. 패션은 몸을 감싸는 천조각 그 이상 이라고.

뭐랄까?


비즈와 폐기된 빨대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는 발상은 '데미우르고스적 재구성'이자, 보이지 않는 빈 공간마저 컬러로 채워 넣는 상상력의 정수였다.


비즈니스로 생존하고 아트로 권위를 얻는 이 묘한 공생의 시대에, 보여주는 이 판타스틱한 세계는

가장 우아한 자기주장처럼 느껴진다.


​아름다움은 때로 비어있는 공간에서 더 강렬하게 존재하며, 우리는 그 부재(不在)의 틈새에서 비로소 패션의 진정한 '색채'의 발견.


30년 전, 패션이 비즈니스인지 아트인지를 두고 치열하게 논하던 그 뜨거운 열정의 시절과

패션의 지난 시절이 보여준 그 눈부신 질주.


가슴 벅찬 감동에 대해 무한 리스펙트를 보내며.


패션이 실용성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선(Line)'과 '공간'의 예술이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옷 너머의 판타지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