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984

by 숨비소리

날이 갈수록 기립성 저혈압이 심해진다.

원래는 그런 질병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adhd약 혹은 항우울제의 부작용이거나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이거나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서거나.

셋 중 하나겠지. 어쩌면 셋 다 일지도 모르고.


오늘 남편에게 제주도에 다녀오겠다고 이야기했다.

흔쾌히 그러라고 하면서도 장모님과 함께 가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언제 장모님하고 제주도 가보겠냐며.

허락은 해주지만 내가 왜 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생각할 생각은 전혀 없다.

엄마와 여행이라니, 피곤할 게 뻔하다.

테마는 가성비 여행이 되겠지.


이제 남은 건 렌터카 예약 정도다.

일정은 첫날 성산일출봉에 갔다가 밥 먹는 것까지만 정해두었다.

나머지는 가서 천천히 생각할 예정이다.

남편은 이런 걸 견디지 못한다.

나의 무계획성 말이다.

그에 비해 나는 여행을 갈 때 합리적인 동선을 짜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겐 목적지를 향하는 길도, 주차장을 찾아 헤매는 시간도 다 여행의 일부분이니까.


여행을 가기로 했지만 생각처럼 들뜨지는 않는다.

내 마음과 하루 종일 싸우는 중이라 즐거워할 여유가 없다.


'너, 애 때문에 힘들다는 거, 사실은 견딜 수 있는데 엄살 부리는 거 아니야? 여행을 가도 될 만큼 열심히 엄마 노릇했어? 정말 제주도에 가고 싶은 거 맞아? 휴직해 있으면서 이렇게 돈 써도 돼? 제주도에 가기로 했으니까 이제 딸내미 투정도 너그럽게 받아주고 집안일도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아? 여행 가니까 이제는 안 힘들어야 되지 않아?'


하는 끝없는 자기 검열.


마음속에는 끝없이 나를 감시하는 빅브러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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