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오늘 학교에 가지 못했다.
어제 겨우 용기를 내 등교를 했는데 남자아이 두 명이 딸아이를 보고 한숨을 쉬며 자기들끼리 킬킬거리더란다.
딸아이가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오는데 딸아이 근처에 있던 그 아이들이 영어로 욕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고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교실에 쳐들어가 그 녀석들의 귀싸대기를 날려버리고 싶었다.
어제 딸아이가 힘겹게 끌어올린 용기는 그렇게 사라졌다.
차에서 내리는 것도 힘겨워하던 아이는 교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고야 말았다.
원래는 아이가 내리면 차를 돌려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오늘은 아이를 데리고 왔다.
아이의 담임선생님께 상황을 전달했다.
아이는 혹시나 그 아이들이 자기를 더 해코지 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네가 겁난다고 하더라도 이건 말해야 돼. 그 아이들이 너를 괴롭히는 거잖아. 더 이상은 엄마도 가만 안 있어."
남편에게 이 상황을 전달했다.
나는 남편이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다.
아니, 그래주길 바랐다.
하지만 남편은 딸아이를 탓했다.
아이가 약하고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학교에 제대로 안 나가니까 타깃이 된 거라는 논리였다.
누가 보면 계부인 줄 알겠지만 놀랍게도 친부다.
어째서 자기 자식에게도 저런 약육강식의 논리를 들이밀 수 있을까.
이해도 안 되고 화도 났지만 상담선생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감정이 수용되어 본 경험이 없어 감정을 표현하거나 수용할 줄 모름. 타인 수용 능력 부족. 공감능력 부족. 정서적으로는 어린이. 보수적. 목표 성취 지향적."
남편을 달랜다.
"일하느라 고생인데 딸 걱정하느라 힘들겠네. 학교는 내가 내일 꼭 보낼게. 많이 답답하겠지만 조금만 더 버텨보자.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일하는데 신경 쓰이게 했나 모르겠다. 그래도 오면 딸내미 편 좀 들어줘. 상담선생님한테 자기는 아빠가 안 놀아줘도 아빠가 많이 좋다고 했다던데, 좋아하는 아빠가 편 들어주면 기운 나잖아. 엄마보다는 아빠가 편들어 주는 게 더 든든하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화가 나서 씩씩 거리는 어린이를 달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들 하나를 더 키우고 있는 것 같다.
"그냥 자식 셋 키운다고 생각하세요."
남편은 아빠나 남편 노릇을 하기에는 정서적으로 어리다고 했다.
어릴 때 채워지지 않은 그 결핍이 채워져야 아빠와 남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도 했다.
나도 결핍된 상태로 자랐는데 어째서 나만 엄마노릇을 해야 하지?
"oo 씨(나)는 성격 자체가 책임감이 강해서 정서적으로 부족하거나 잘 배우지 못한 역할들은 책으로 배워서라도 그 역할을 수행하려고 해요.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에 대한 개방성도 높고......"
그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지.
내가 억울하다고 남편의 빈 곳을 외면해 버리면 남편은 결코 남편으로, 아빠로 성장할 수 없을 테니까.
'이래서 집안을 봐야 하는 건가.'
돈이나 예의범절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임을 요즘에서야 깨닫는다.
그래도 요즘은 약과 상담을 통해 나 자신이 많이 단단해졌다.
그렇기에 이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있다.
예전의 나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괴롭고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제는 눈물을 흘리거나 화를 내기보다 사태를 판단하고 관리하고 해결하려 한다.
뚜렷한 형체도 없이 공기 중에 흩어져있는 옅은 안개 같던 나의 자아가 조금씩 형체를 갖추고 뿌리를 내린다.
바다 위를 떠돌던 배가 닻을 내리며 정박하려 한다.
단단해진 나는 남편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부드럽게 전달하고 아이에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자신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가느다랗고 작았던 나의 생각과 욕구들이 내 손 끝에서, 내 입술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자아는, 매일매일 단단한 형상으로 변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