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딸아이가 상담을 받는 날이었지만 아이는 보이콧을 선언했다.
수요일에 풀배터리 검사를 받았으니 또 가기는 싫다는 게 이유였다.
보통 때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를 데려갔겠지만 화요일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상담선생님과 먼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나와 아이의 상담일정을 바꾸었다.
"대신에 따라갈래. 가나디 티셔츠 사고 싶어."
"으이구... 알았어."
화요일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될까 봐 껄끄러웠던 걸까.
피곤하다고 찡얼거리더니 내가 외출준비를 하는 동안 아이는 잠들어 버렸다.
요즘 유독 잠을 많이 잔다.
혼자 둘 수가 없어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했더니 친정엄마도 당장은 못 온다고 하신다.
할 수 없이 아이를 집에 두고 상담센터로 향했다.
낮시간엔 그래도 덜 우울해하는 편이니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내 상담이었지만 절반 정도는 딸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의사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부터 화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이가 내게 뭐라 말했는지 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상담선생님께 전달했다.
정보의 공유가 아이를 치료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9에 전화를 한 걸 보면 굉장히 대범한 성격인데... 보통 애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전화를 못 하거든요."
상담선생님도 혼란스러워하신다.
분명 기도 세고 겁도 없고 대범한 아이인데 어째서 친구들에게만은 대응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의사 선생님께서 처음에 병원에 왔을 때는 불안의 이유가 뚜렷했는데 지금은 특별한 이유가 보이지 않는데요. 공황장애 전조 증상도 보이고 있고."
"... 아무래도 범불안장애 같아요. 더 관찰을 해봐야겠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범불안장애.
특별한 이유도 없이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불안해하는 상태.
"사실, xx이(딸)가 자라온 환경을 보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너무 건방지게 굴어서 문제가 되어야 할 것 같거든요? 부모님도 허용적이고 아이 말도 잘 들어주고 사랑도 많이 주고......"
"혹시...... 유전적 소인이 큰 걸까요? 저도 불안도가 높지만 친정엄마는 저보다 더 심하거든요. 외가 쪽에 그런 기질이 있어서......"
나는 상담선생님께 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의 일을 이야기했다.
나랑 연락이 닿지 않자 당장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던 친정엄마의 이야기를.
상담선생님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머니가 불안이 굉장히 높으시네요."
그리곤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친정어머니가 그 정도라면...... 아무래도 xx이(딸)도 유전적 소인이 굉장히 클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순간 그럼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은 꺼내지 못했다.
죄책감에서 벗어날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야 내 이야기를 꺼낸다.
밖에서 들리는 경적소리나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에도 나는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화요일에 있었던 일을 통해 느낀 거지만 내 스스로가 굉장히 단단해져서 이제는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게 돼서 너무 행복하다, 하지만 남편에 대해 이유 모를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딸아이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 엄마의 역할 특히 요리와 관련된 영역에 대해 강박적인 생각을 하는 건 아직 나아지지 않는다 등등.
상담선생님은 나와 남편에 대한 문제부터 다룬다.
남편은 굉장히 자기 방어적인 사람이다.
그런 남편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화'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누군가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게 되면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는 거다.
그리고 경험을 통해 남편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화를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거나 부탁을 하려고 하면 혹시나 화를 낼까 봐 무서워하고 불안해한다.
상담선생님이 내게 숙제를 내주신다.
"우선 이번 주에는 자각하는 것부터 해보세요. 내가 남편 때문에 지금 불안해지고 있구나를 자각하고 나면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저 화는 남편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련한 방패야. 그러니 저 감정은 나를 향한 게 아니야. 그리고 저건 남편의 감정일 뿐이야. 이렇게 남편과 내 감정 사이에 선을 긋는 거죠."
사실 나는 사회생활을 할 때는 감정의 구분을 굉장히 잘하는 편이다.
'어떤 사건 혹은 사람-그 일로 인한 감정'이 한 세트가 되어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 사건의 영역에 있을 때는 당연히 그 감정을 느끼지만 그 영역을 벗어나고 나면 그 감정도 사라진다.
재작년엔가.
딸아이와 비슷한 아이를 맡게 되었을 때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힘들겠다며 나를 위로했지만 정작 나는 힘들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아이가 있는 직장에서는 그 아이 때문에 걱정도 되고 신경도 곤두섰지만 일단 집에만 오면 완전히 잊고 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가정생활에서는 그게 안된다.
남편과 나의 감정, 아이와 나의 감정을 분리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분리해야만 한다.
언제까지고 가족들의 감정에 휩쓸려 나를 버린 채 살아갈 순 없으니까.
그리고 내려진 또 다른 숙제, 매일 나를 칭찬하기.
딸아이는 색감과 공간감각을 타고난 편이라 색깔도 굉장히 잘 쓰고 러프스케치가 없어도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
'위에서 아래, 손에서 얼굴, 하체에서 상체' 등 다양한 방향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어려워하지 않는다.
선 몇 개를 슥슥 그을 때는 도대체 저게 무슨 그림이 될까 싶은데 어느샌가 몇 개 되지도 않는 선으로 사람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도 아이는 늘 자기는 그림에 재능이 없으니 그림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그럴 때면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종종 아이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어제 상담을 하며 깨달았다.
그렇게 안타까운 짓을 내가 나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는 걸.
"어머니께서 는 정말 대처를 잘하고 계신 거예요.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계시잖아요."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너라서 지금까지 해낸 거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엄마노릇 열심히 하는 사람이야. 나는 너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 못 봤다."
남들이 아무리 내 귀에 대고 말해줘도 내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말들.
그 말들을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는 것이 이번 주의 또 다른 숙제다.
숙제를 잔뜩 짊어지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했다.
제육볶음과 오징어 미나리 초무침, 양배추계란전.
휴직을 하고 전업주부로 지내다 보니 한꺼번에 반찬 세 개를 만들어 내는 건 이제 일도 아닐 지경이다.
퇴근한 남편이 딸아이에게 물었다.
"오늘은 학교 갔다 왔어?"
"딸내미 화요일부터 학교 안 가고 있는데 내가 말 안 했어?"
너무 급작스레 결정한 일이라 남편에게 말을 안 했었나 보다.
하긴 그 상황에 내가 무슨 정신이 있었을까.
어쩌면 말을 했는데 남편이 건성으로 들었을 수도 있고.
"의사 선생님이 공황장애도 시작되려고 하니까 할 수 있으면 학교를 쉬는 게 좋다고 해서 그때 쉬기로 했었잖아. 그런데 화요일에 그런 일도 있고 해서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그때부터 쉬고 있어."
남편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딸아이가 들뜬 목소리로
"내일 친구들이랑 놀러 갈 거야. 놀고 나서 우리 집에도 올 거라 방 치워야 돼."
라고 말했다.
친구들과 놀러 가거나 친구들이 놀러 오는 건 오랜만이다.
아직까지 학교 친구들과의 연이 끊어진 건 아니구나.
나는 안심한다.
오늘은 새로 사귄 자기 반 친구도 같이 온다는데,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있으면서 새 친구는 어떻게 사귄 걸까.
대범함.
학교를 가지 않아도 친구들을 당당하게 만나고, 죽고 싶은 순간에 119에 전화를 걸고, 팔에 새겨진 흉터도 드러낼 수 있는 기질.
'우울증한테 지지는 않겠네.'
옅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친정엄마의 대범함과 배짱이, 대를 걸러 외손녀에게는 전해졌나 보다.
"엄마, 그래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앵무새집 청소 좀."
"알았어, 알았어. 엄마가 네 방 청소랑 다 해놓을게."
아이가 친구와 어울린다는 사실이 기뻐 나는 뭐든 해줄 태세가 된다.
그나저나 쟤가 언제부터 체면을 차렸지?
어제 샤워를 했는데 또 샤워를 하고 나간다고?
사소하지만 무언가 바뀐 듯한 느낌이 든다.
의사선생님께 전할 이야기 목록에 이 내용을 적어 넣는다.
이제 슬슬 일어나 청소를 할 시간이다.
화요일에 몰아쳤던 살이 떨릴 만큼 무섭고 불안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듯 마음이 밝아진다.
오늘은 왠지 즐겁고 평온하다.
이 즐거움과 평온이 아이의 마음에도 스며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