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삿포로의 장르는 겨울왕국이 아니라 설국열차다.

일본 한 달 살기: 홋카이도 입국편

by 유키토피아



인생은 원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한 달 살기를 앞둔 2월 초, 갑작스럽게 출국일정을 당기게 되었다. 원래는 설날 연휴가 끝난 2월 13일에 출국을 하려고 했으나, 설날 바로 다음날인 2월 11일로 항공편을 다시 구매했다. 일정을 변경하게 된 이유는 그날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삿포로 눈축제 마지막날이기 때문이다.


원래 삿포로 눈축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출국 한 달 전 호기심에 찾아본 눈축제 홍보 사이트에게 영업당하고 말았다. 사실은 일부러 축제 기간을 피해서 저렴한 항공권을 예약했던 것인데, 나의 꼼수는 홍보 사이트 하나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때마침 특가 항공권이 떠서 기존 항공권의 취소수수료를 지불해도 손해가 크지 않아서 바로 눈축제 마지막날 입국하는 비행기표로 다시 구매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민 가는 거 아닙니다



2월 11일 월요일, 드디어 출국날이 밝았다. 전날까지 가족들이랑 옹기종기 모여 설날 기념 만두를 빚고 있었는데, 자고 일어나서 나 홀로 공항으로 가자니 기분이 굉장히 묘하다.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시간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하지만, 한 편으론 의지할 사람 없이 나 홀로 지내게 될 한 달이 조금 무섭기도 했다.



P20240211_095027443_399A7A21-04EA-4D86-9D95-9ABED47132A4.HEIC
P20240211_095021779_DAE9E721-3D79-4A82-A2F6-9672B00A6A81.HEIC


출국 전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에 출국 수속은 매우 순조로웠다. 하지만 머지않아 나는 이 철저한 준비성 때문에 일본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끊임없이 괴롭힘 당하게 된다. 짐을 너무 과하게 챙겨왔기 때문이다. 한 달 분량을 챙겨야 해서 짐이 많기도 했지만, 겨울왕국인 홋카이도에서 한국보다 따듯한 도쿄까지 가야 하니 옷을 두배로 챙길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덩치 큰 촬영장비까지 챙겼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기내수하물과 위탁수하물을 합치면 아슬아슬하게 25kg가 나왔다. 위탁수하물 무게를 추가하지 않아 기내수하물이 10kg나 되는지라 이걸 들고 머나먼 탑승게이트까지 가려니 정말 팔 떨어지는 줄 알았다.


설상가상으로 수하물 무게를 줄여보겠다고 무거운 외투들은 최대한 껴입고 왔었다. 가방에는 노트북, 신발은 부츠를 신고 있었다. 노트북과 부츠도 엑스레이 검색대에 올려야하는 품목들이라 옷 벗으랴 짐 빼서 올리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심사가 늦어질까봐 내 순번이 오기도 전에 미리 다 벗고 바구니에 올려둘 준비를 하고 있으니,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양파같은 내 모습에 사람들이 기이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용한 검색대 바구니만 4개…솔직히 부끄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나 때문에 심사줄이 밀리는 없어서 민폐는 피했다.


그렇게 들어와서 출출하니 파리바게트에서 샌드위치 좀 사 먹고 탑승게이트 118번으로 이동했다. 게이트에 도착하니 9시 50분 전, 비행기 시간까지 3시간이나 남았다. 체크인도, 출국심사도 물 흐르듯 순조로워서 너무 빨리 도착해 버렸다. 덩그러니 짐을 두고 쇼핑을 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3시간 동안 정말 의자에만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늦어서 마음 졸이는 것보단 마음 편하게 일찍 오는게 좋다.





타인을 사랑하기 전에

나를 먼저 사랑하기



비행기 탑승 후, 나는 미리 결제해 둔 창가석에 앉았다. 내 옆에는 중국계로 보이는 할머니와 손자가 앉아있었는데, 할머니께서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서투른 영어로 자기 손주에게 창가석을 양보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내 영어실력도 좋지 않은데 중국식 억양이라 이해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차라리 중국인이라면 중국어로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우선 중국인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영어로 "Where are you from?"하고 물어봤다. 할머니는 당황한 표정으로 "China."라고 대답하셨다. (갑자기 냅다 국적을 물어보니 당황하신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중국어로 "이 자리는 제가 추가금을 내고 얻은 자리예요. 미안합니다."라고 대답했고, 한참 고민한 뒤 다시 "만약 손자가 꼭 여기 앉고 싶어 한다면 비켜드릴게요."라고 말씀드렸다. 이에 할머니는 돈을 낸 거라면 괜찮다며 내가 했던 말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다.


P20240211_141516403_F54FC6A8-0817-4B78-B385-F9EB70B2EA54.HEIC


과거의 나였다면 어린이에게 얼마든지 자리를 비켜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더 이상 타인을 챙겨주려다 스스로에게 소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의 나는 오지랖이 많은 편이다. 남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다 퍼주고, 정작 본인은 본전도 못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회사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호의로 가득한 행동이라고 해도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베풀려고 한다면 배려가 아닌 오지랖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행동은 필요할 때만 찾는 빈대 같은 인간을 모여들게 할 뿐이다. 올바른 호의는 본인을 먼저 챙기고 나서 남는 여유가 있을 때 베푸는 것이 가장 좋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보여



3시간을 날아와 도착한 치토세 공항, 입국수속과 출금을 빠르게 마치고 바로 삿포로행 기차를 탔다. 기차 너머로 바라본 풍경은 작품이 따로 없었다. 하햔 눈이 초밥처럼 소복하게 쌓여있는 게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영화 속에서 봤던 꿈 같은 풍경을 실제로 보니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홋카이도는 12월부터 4월까지 총 5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눈이 내린다. 실제로 365일 중 평균적으로 143.5일 동안 눈이 내린다고 한다. 그리고 한 번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기차 운행이 중단될 정도로 폭설리 내리며,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온 세상이 하얘지는 '화이트아웃'현상으로 모든 교통이 마비가 되기도 한다.


홋카이도는 수준 높은 제설 시스템이 갖추고 있다. 하지만 눈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내리기도 하고, 지방 특성인 인력난 때문에 완벽한 제설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눈을 치우고 뒤돌아보면 치웠던 만큼 도로 눈이 쌓여있는 것이 홋카이도의 일상이다. 이 때문에 고속도로나 중심가에는 열선을 깔아둔 곳도 있고, 눈이 쌓일 때마다 제설차량이 보행자 도로 한쪽에 눈을 높게 쌓아올린다. 그래서 겨울에 삿포로에 가면 사람 키만큼 쌓인 눈덩이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도로 위에 미끄럼 방지 가루를 뿌리지만 솔직히 효과는 미미하다. 하지만 삿포로 시민들은 이 빙판길을 넘어지지도 않고, 심지어 뛰어다니는 사람도 봤다. 넘어지는 건 관광객 뿐이다.





겨울왕국인 줄 알고 왔는데

글쎄 내가 탄 열차가 설국열차였더라고



그렇다. 나는 지금 '조졌음'을 감지한 것이다.

삿포로 역에 도착해보니 세상이 온통 눈길, 아니 빙판길이다.


P20240211_165110766_AEFEBDC0-539B-4AAE-8480-CC0C54A32576.HEIC
스크린샷 2024-10-27 오후 8.28.09.png


삿포르의 중심지역인 삿포로역에서 스스키노 사이에는 눈을 피해 걸어다닐 수 있는 초대형 지하통로가 마련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지하통로로 접근할 수 있는 숙소를 구한다. 하지만 나는 당시 급하게 일정을 당겨서 지하통로 인근 숙소를 구하는데 실패해 눈길을 걸어야만 했다. 문제는 내 캐리어 무게가 25kg라는 거다. 도로에는 빙판길도 힘든데 그 위로 눈이 10cm정도로 도톰하게 쌓여 있어서 바퀴가 눈에 파묻혀서 굴러가지 않았다. 캐리어를 들고 가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의 무게감에 너무 힘들어서 조금 울고 싶어졌다.


캐리어가 너무 무거워 도저히 멀쩡한 속도를 낼 수가 없어 결국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눈덩이 쪽으로 몸과 캐리어를 밀착시켜서 길을 비켜줘야 했다. 보행자 도로에 쌓아둔 눈덩이 때문에 길이 좁아서 길이 막혀버리기 때문이다. '스미마셍(すみません: 미안합니다)'를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일본 와서 가장 처음 말한 단어가 '스미마셍'이라니… 어떤 이는 나를 안타깝게 보면서 스쳐 지나갔고, 어떤 이는 ‘타이헨데시타네(大変でしたね: 정말 힘드시겠어요)’하면서 공감과 격려를 해주는 분도 계셨다.


게다가 구글맵 GPS 반응 속도가 느려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숙소까지 45분이나 걸렸다. 첫 번째 숙소는 역에서 12분이면 된다고 해서 예약했는데 말이다.


숙소에 도착했는데, 팔다리 근육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머무를 방은 3층이라 남자 직원이 짐을 옮겨주겠다고 해서 살짝 기뻤지만, 무거워서 미안해질 것 같아 거절했다. 하지만 직원이 괜찮다며 짐을 들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남자라 짐을 거뜬하게 들긴 했는데, 묵직함에 살짝 당황하셔서 약간 민망했던 건 비밀이다.) 첫 숙소는 급하게 구한 곳 치고는 상태가 좋았다. 직원들도 친절하고, 청결 상태도 아주 좋았다. 암막커튼이 달린 캡슐호텔 스타일의 게스트하우스라서 사생활이 어느 정도 보호된다. 매트리스도 잠깐 누웠는데 꽤 편안해서 체력을 보충하기에 딱 좋아서 덕분에 눈축제를 충분하게 즐기고 올 수 있었다.


다음 편에는 삿포로 눈축제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