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도쿄 한 달 여행의 시작-
2023년 12월 31일,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사는 굉장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퇴사 시그널'은 분명히 있었지만, 안정적인 직장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적당한 급여, 적당한 직급, 적당한 워라밸에
적당히 만족하는 '적당한 삶'.
나는 이 적당한 삶을 꽤나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의 여유는 점점 사라져만 갔다. 직무에 대한 도전정신과 성취감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갈 뿐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다녀온 시드니 여행이 인생에 커다란 나비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한 번도 동아시아를 벗어난 적 없는 나는 시드니의 이국적이고 여유로운 풍경에 단 번에 매료되었고, 이런 자극은 나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 주었다. 사실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번아웃에 빠져 있었다. 일에 대한 열정이 식었고, 삶에 대한 의욕까지 잃어버린 주제에 현재 생활에 만족한다며 눈을 가리고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유도 모른 채 컨디션이 점점 나빠졌고, 급기야 출근이 힘들 정도로 자주 아프기 시작했다. 결국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감에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해 퇴사를 결정한다.
퇴사를 하기로 마음 먹으면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몸은 무직이되 정신만큼은 무적이 되어 평소에 하지 않던 과감한 행동과 도전을 저지른다(?). 나의 과감한 도전은 '해외에서 한 달 살기'였다.
시작은 한적한 바닷가 어딘가에서 한 달 정도 푹 쉬고 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국내 한 달 살기 비용을 검색해 봤는데, 생각보다 비싸서 놀랐다. 속으로 '이 돈이면 해외여행을 가는 게 훨씬 가성비가 좋겠어.'라며 혀를 찼다. 그런데 문득 몇 번이나 가려고 했지만 가지 못했던 홋카이도의 삿포로, 도쿄가 떠올랐다. 회사원에게 여행이란 시간, 예산, 같이 갈 사람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딱 맞아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백수가 될 나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 백수는 남는 게 시간이다.
돈? 나에겐 퇴직금이 있다.
같이 갈 사람? 혼자여도 재밌을 것 같다.
약간의 충동이 더해져 결단은 빠르게 내려졌다. 나중을 위한다는 핑계로 스스로에게 소홀했던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그 동안 수고했다며 보상을 주는 마음으로 꿈에 그리던 일본 한 달 살기를 해보기로 한다.
퇴사와 동시에 찾아온 1월에는 건강을 회복하면서 일본 한 달 살기 계획에 집중했다. 나는 흥미가 있는 일에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획하는 걸 좋아한다. 이 때문에 홋카이도의 관광요소와 역사는 물론이며 영화, 드라마, 만화책 등의 작품까지 찾아보고 정리하며 자료수집에 몰두했다. 그리고 음식을 조금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라 각 지역의 특산품, 대표음식부터 현지인들만 간다는 맛집까지 조사하여 계획에 포함시켰다.
가고 싶은 장소, 보고 싶은 풍경, 먹고 싶은 음식들을 전부 한 달 안에 넣어보니 이런 일정표가 만들어졌다. 한 달 살기를 시작하는 겨울에 가장 아름다운 홋카이도에서 2주간 기차여행을 하고, 따듯한 도쿄로 넘어와 2주를 살기로 한다.
홋카이도, 도쿄 한 달 살기 미리보기
홋카이도에서는 삿포로, 오타루, 비에이와 같은 유명한 지역부터 하코다테, 아사히카와, 아바시리 등 마이너한 동네를 일정에 포함시켰다. 홋카이도는 대한민국의 땅 크기와 비슷해서 거의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는 수준의 쉴 틈 없는 극악의 여행일정이 되버리고 말았다. 접근성이 나쁜 온천마을인 도야호, 시코츠 호수, 쇼와신산 등은 버스 당일투어를 예약해서 가기로 한다.
홋카이도에서 이렇게 2주를 보내고, 국내선을 타고 따듯한 도쿄로 내려올 예정이다. 도쿄는 일주일 정도만 돌아도 핵심 지역은 전부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근교 소도시까지 범위를 넓게 잡았다. 대표적으로 해변을 달리는 전차로 유명한 가마쿠라, 후지산으로 유명한 가와구치코, 한국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에도시대 풍경이 남아있는 사와라 마을을 기차 당일치기로 방문한다. 그리고 도쿄에 갔으니 디즈니랜드도 빠질 수 없다.
남들은 한 달 살기를 현지인처럼 살아보거나 여유를 가지려고 하는데, 욕심 많은 나는 시간을 30분 단위로 쪼개어 여행 일정들로 꽉꽉 채워버렸다. 주변 사람들은 너무 힘들지 않겠냐며 걱정했지만, 의외로 무난하게 일정을 해치워나갔다(?). 다만 통장이 '텅장'이 되어버렸을 뿐.
마지막 준비는 특산품 미리 먹어보기. 홋카이도는 신선한 해산물과 유제품이 유명한 곳으로, 한국에서 쉽게 먹지 못하는 신선한 연어알과 성게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둘 다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었기에 한국에서 평균적인 맛은 어떤 수준인지 알고자 집 근처에 유명한 초밥집을 방문했다. 당황스럽게도, 한국에서 맛본 연어알, 성게알은 비린 냄새가 너무 강해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홋카이도에서 이 해산물을 꼭 먹어야 하나 고민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싫어도 음식이 주는 경험을 포기할 수 없기에, 홋카이도에서 연어알과 성게알 맛보기에 재도전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후, 이 특산품들은 홋카이도 최애 음식이 된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홋카이도가 배경인 <러브레터>,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 등 작품을 감상하며 출국일을 기다리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