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열의 씨알여행240-귀룽나무2. 귀룽나무의 상상을 초월하는 생존비밀
귀룽나무는 지구상에 오래 살아남기 위하여 10가지 생존비책을 세워 은밀히 활용하고 있다. 그 비책 하나하나가 인간의 지혜를 뛰어 넘는다고 생각되니 참 놀라운 일이다. AI도 탄복(歎服)할 것 같다.
1. 점2개로 병해충은 막고 수분(受粉)은 도와
귀룽나무 잎자루에는 좁쌀모양의 2개의 선점(腺點)이 있다. 선점이 풍기는 향기•냄새 등이 개미를 유인(誘引)해서 용병으로 활용하여 해충을 방어한다. 한편 나비 대신에 파리와 벌을 끌어들여 꽃가루받이(受粉)를 돕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선점에서 나오는 어떤 물질이 개미, 파리, 벌을 유혹하는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다만 선점에 있는 주요 화합물질은 배당체(配糖體, glycocide 또는 saponin)로 알려져 있다.
2. 꽃 역시 향기와 꿀로 벌과 파리를 유인하여 수분(受粉)을 도와
귀룽나무 꽃은 아몬드 향이 난다. 꿀은 꽃 안 깊숙이 있지 않으며, 꽃 잎은 평평하고 넓어 벌과 파리가 편하게 앉아 꿀과 꽃가루를 쉽게 모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꽃 구조 자체가 나비 보다는 벌과 파리가 꿀을 먹고 꽃가루를 모으기에 유리하다. 꽃이 필 때 주변에 나비는 적은 데 이상하게도 파리나 벌이 많은 이유다.
이처럼 귀룽나무는 나비와 경쟁을 피하며 벌이나 파리를 이용하여 꽃가루받이를 쉽게 하고 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나름 계획을 세워 오랜 기간에 걸쳐 그런 방향으로 진화해온 노력과 지혜의 산물이라고 본다.
3. 잎과 가지도 상처를 입으면 독성물질을 뿜어내 병해충의 침입을 막아
귀룽나무 잎과 가지는 꺾거나 씹으면 고무 타는 듯한 고약하고 불쾌한 냄새가 나거나 아몬드 향이나 자극적이고 매운 향이 난다. 이것은 우리가 독극물로 알고 있는 청산(HCN)의 CN기와 결합된 시안화물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귀룽나무가 곤충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바로 이런 독극물을 내보내 병해충의 침입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한다. 한편 이런 독성물질 때문에 아몬드는 날 것 대신 볶아서 먹는 게 좋다.
4. 종자번식에 실패해도 뿌리가 새순을 내어 살아 남는다
귀룽나무는 뿌리에도 맹아(萌芽)가 많다. 오래된 큰 나무 아래에 새순이 많이 자라는 이유다.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적어 실생번식(實生繁植)이 어려우면 뿌리맹아(根萌芽)가 싹을 틔워 새순으로 자란다.
게다가 속성수(速成樹)라 쉬 자라 빨리 어른나무가 된다. 때문에 꽃이 피지 않아도, 열매와 씨가 없어도 뿌리에서 싹이 나와 영양생식(營養生殖)만으로 번식을 한다. 다시 말하면 무성번식(無性繁殖)만으로 대(代)를 이을 수 있다.
이처럼 2중 3중으로 살아 남아 후대를 이을 수 있도록 만반의 계책(計策)을 준비해둔 셈이다.
5. 꽃차례 아래에 잎을 달아 양분을 생산하여 꽃과 열매에 빠르게 적기(適期) 공급
귀룽나무 꽃차례(花序) 아래에는 잎이 달려 있다. 이는 꽃 가까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 광합성 등으로 바로 필요한 양분을 생산하여 빨리 공급함으로써 꽃과 씨 생산을 최대한 돕기 위해서다.
그리고 흰색 꽃과 녹색 잎의 조화가 꽃가루받이 매개충(媒介蟲)인 벌과 파리의 유인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6. 씨는 새가 소화하지 못해 배설물과 함께 천지사방으로 멀리 퍼져나감
완전히 잘 익은 검은 열매귀룽나무 열매는 쓰고 시나 새들에겐 좋은 먹이다. 그래서 영어 이름이 Bird cherry(새 벚지)일 정도다.
새가 열매를 먹으면 열매는 소화하여 양분을 취하지만 씨는 소화를 못 시켜 배설물에 섞여 나온다.
발 없는 씨가 새를 통해서 천지사방으로 멀리 이동하여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 설계를 해놓은 거다.
7. 나무인데 생식생장기간이 4개월 밖에 안 되어 씨 생산이 빠르고 쉬워
귀룽나무는 나무인데도 4월 중순에 꽃이 피어 8월 초순에 열매가 익을 때까지 4개월도 안 걸린다. 다른 나무에 비해 생식생장기간이 많이 짧아 씨 생산이 빨라서 번식이 쉬운 편이다. 씨를 생산하는 기간을 최대한 짧게 해 씨 생산에 미치는 위험을 최대한 줄이고 있다.
8. 엄청난 꽃을 피워 많은 열매 생산에 운명을 걸기도 한다
귀룽나무는 생존을 위해 열매의 대량 생산에 목숨을 거는지도 모른다.
꽃이 피는 4월에 귀룽나무 아래를 가보라. 나무에 꽃이 하얗게 달려 있는데도 나무아래 땅은 흰 꽃을 널어놓은 듯 온통 꽃잎으로 덮여 있다.
의료 시설이나 약이 열악한 옛날에 병들어 애들이 죽을 지도 모르다는 걱정 때문에 우리네 옛날 부모들이 아이를 10여명이 넘을 정도로 많이 낳았던 이치와 같다.
9. 잎에 벌레혹(蟲癭)을 만들어 벌레와 공생할 줄 알아
귀룽나무는 병해충이 잎에 침입하면 잎의 일부를 병해충에게 내주어 살게 하는 데 이때 혹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이 벌레집이다. 벌레는 여기에 알을 낳아 기르는 데 이때 벌레는 자기가 사는 집이 있는 잎을 빼고는 다른 잎은 해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신기한 것은 벌레 혹이 모두 같은 벌레의 혹이며 종류가 다른 벌레의 혹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먼저 들어와 사는 벌레가 다른 벌레가 침입하는 것을 막아주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아니면 벌레들 간의 생존을 위한 도리이자 약속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귀룽나무는 먼저 찾아온 벌레에게 집을 지어 살도록 해주고, 그 벌레는 다른 종류의 벌레가 처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며 공생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조건 벌레의 침입을 막는 게 아니라 벌레도 살리고 나무도 사는 슬기로운 공생을 한다.
10. 가지는 안이 스폰지 같은 수(髓)로 채워있어 아래로 처지며 꽃•열매의 무게를 견딘다
일반적으로 나무의 가지는 안이 목질(木質)로 되어 있으나 귀룽나무 끝의 잔 가지는 안이 목질이 아니고 스티로폼 같은 수(髓)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가는 철사 등으로 밀면 국수처럼 생긴 것이 끊어져 떨어져 나온다.
이처럼 귀룽나무 잔 가지가 목질이 아닌 스티로폼 같은 것으로 심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가지가 가볍고 유연하여 잘 부러지지 않고 휘거나 아래로 늘어져 대량의 꽃과 열매의 무게를 잘 견딜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귀룽나무는 영속적 생존에 필요하고 중요한 씨를 대량 생산한다.
귀룽나무는 볼 때마다 나를 부끄럽게 한다. 한낱 나무도 생존하기 위해 이처럼 촘촘하고 지혜로운 생존비책을 세우고 있는 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인 나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생존전략을 갖고 있지도 않고, 아니 그런 생존전략 자체를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어났기에, 그저 사는 데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죽어라 일만 하고 살았을 뿐이다. 늦었지만 앞으로라도 나름의 생존전략을 세워 잘 살아 보려고 한다.
어찌보면 살아 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지 모른다.
필자 주
1. 선점(腺點)은 식물의 잎, 꽃 등에 있는 분비 샘이 모인 작은 점으로 향기, 냄새, 독성을 지녀 곤충의 유인, 병해충의 방어, 수지(樹脂)•점액(粘液)•유적(油滴) 분비로 식물조직보호 역할을 하며, 선점의 유무가 식물분류 요인으로 활용되기도 하는 식물조직의 하나다.
선점에는 프루나신(prunasin), 프룰라우라신(prulaurasin), 아미그달린(amygdalin)과 같은 배당체(配糖體, glycosides or saponin)인 화합물질이 들어 있어 상처가 나면 시안화물 같은 독성물질이 나온다. 영어로는 pellucid dot, oil gland(유점, 油點), glandular dot이라고 한다.
2. https://www.graftingardeners.co.uk/trees/, https://www.woodlandtrust.org.uk/trees-woods-and-wildlife/british-trees/a-z-of-british-trees/bird-cherry/,
https://botsocscot.wordpress.com/2023/05/14/plant-of-the-week-15th-may-2023-bird-cherry-prunus-padus/, Prunus padus | European bird cherry - Van den Berk Nurseries 등을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