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협화음/하나의 울림
https://brunch.co.kr/@yukyung2001/112
0. 프롤로그
1. 루카의 생일
2. 꽃잎을 어루만지듯
3. 조각난 꿈
4. 헐값에 팔린 꿈
5. 악몽
6. 공명
7. 한줄기 빛
8. 엘리
9. 소중이
10. 연주여행
11. 친구
12. 꿈의 무대
13. 크리스마스의 기적
봄의 꽃망울이 하나둘 피어날 때까지, 마르코의 연주는 계속되었다.
밀라노와 볼로냐를 지나, 나폴리를 거치며 그의 첫 음은 떨림에서 울림으로 피어났다.
어느 늦은 봄날, 이사벨라가 마르코의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마르코, 베르디 후원재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마르코는 잠시 활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사벨라는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어갔다.
"라 페니체 극장에서 열리는 실내악 앙상블에 당신이 초대받았어요."
그날 밤, 마르코는 조심스레 소중이에게 물었다.
"소중아, 실내악 앙상블… 어떻게 생각해?"
소중이의 현이 가늘게 흔들렸다.
‘다들 자기 빛깔이 강할 텐데…’
마르코는 그 망설임을 읽은 듯 부드럽게 웃었다.
"벨라도 함께할 거야. 에도아르도와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 이름이 불리자, 소중이의 현이 풀어지며, 설렘의 선율이 퍼져나갔다.
한 달 후,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문이 열리는 순간, 마르코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한 세기 전 이곳에서 울려 퍼졌던 베르디와 로시니의 노래들이 되살아난 듯, 그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들어 깨웠다.
무대 위에서는 하얀 셔츠 위로 붉은빛 완장을 찬 로시가 호른을 조립하고 있었다.
금속 부품들이 탁탁 부딪히는 차가운 소리에, 소중이의 몸통이 순간 뻣뻣해졌다.
“어서 와, 마르코.”
마르코를 알아본 에도아르도의 손짓에, 소중이의 나뭇결이 겨우 누그러졌다.
문이 다시 열리며 피아노 연주자 루치아가 들어섰다. 프랑스 자수가 수 놓인 실크 블라우스, 목에서 반짝이는 커다란 진주 목걸이.
사회주의자 로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피아노 뒤쪽에서 유대계 첼리스트 사무엘이 조용히 악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현을 짚는 그의 손가락이 조심스러웠다.
보면대 위에는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악보가 펼쳐져 있었다.
연주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첫 음을 내기 위해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벨라가 또렷한 음으로 첫마디를 열었다.
소중이는 깊은 감정에 싸인채 선율을 흘려보냈고, 그 흔들거리는 파동에 벨라의 몸통이 흠칫 했다.
루치아의 피아노가 우아하게 둘 사이를 연결하려 했다.
하지만 곧 로시의 호른이 포르테시모로 터져 나오며 공간을 흔들었다.
사무엘의 첼로가 방향을 잃은 듯 휘청이며 저음을 채웠다.
다섯 갈래의 마음이 어긋난채로 공중에서 부딪히고 있었다.
잠시 후
커튼 뒤에서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울리고
마에스트로 안토니오가 보면대 앞에 섰다.
흩어져 있던 시선들이 하나둘 그에게로 향했다.
"<나부코>는 먼 바빌론 땅에 끌려간 히브리인들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베르디는 이 곡에 이탈리아인들의 간절함을 녹여넣었지요."
'히브리인들'이라는 말에 유대계 사무엘의 첼로 몸통이 미세하게 경직되었고, 지난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벨라에게서도 한숨같은 울림이 새어 나왔다.
엇갈림은 한동안 반복됬다.
하지만, 마에스트로의 따뜻한 눈빛과 부드러운 손짓에 흩어진 소리들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안토니오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곡은 오스트리아의 그림자 아래 뿔뿔이 흩어져 살던 이탈리아인들이 하나의 조국을 그리며 부른 간절한 노래였습니다."
'하나의 조국'이라는 문장이 로시와 루치아 사이에 작은 다리를 놓았다.
그가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해봅시다. 각자 그리워하는 무언가를 마음에 담으면서요."
마에스트로의 손짓이 고요한 물결을 일으키자, 다섯 마음이 한 줄기로 모였다.
벨라가 첫 선율을 열자, 소중이의 나뭇결이 조용히 그 떨림을 받아들였다.
로시의 호른과 루치아의 피아노, 사무엘의 첼로가 차례로 합류하며, 흩어졌던 숨결들이 서로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쌓여 갈수록 서로 다른 악기의 빛깔들이 때론 부딪치고 때로는 스며들며 차곡차곡 포개졌다.
그 겹겹의 음색은 마침내 하나의 무지갯빛 울림으로 피어올랐다.
여름비가 유리창을 적시는 저녁, 베네치아의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공연 전 리허설이 시작되려던 순간, 바이올린 케이스를 연 마르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소중이의 넥 부분에 가느다란 실금이 벌어져 있었다. 며칠째 이어진 베네치아의 습한 공기와 강한 무대 조명이 나무를 괴롭힌 듯했다.
모두 당황하고 있을 그때, 한 노인이 조용히 무대 위로 걸어올랐다.
바이올린의 장인, 엘리 할아버지였다.
베네치아 음악원 출장 수리를 마친 그는, 때마침 마르코의 연주회를 보기 위해 일찍 도착해 있었고, 객석에서 소중이의 상태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차에 연장들이 있어요. 걱정 마세요, 마르코."
문이 열리고 관객들의 발걸음 소리가 물결처럼 들려오는 가운데, 엘리 할아버지가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소중이를 건넸다.
" 이제 괜찮을 거예요."
악기들의 조율 소리가 무대 위를 떠다니고, 객석의 공기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2층 발코니 객석에는 루카가 작은 노트를 무릎에 올린 채 앉아 있었다.
첼로의 울림 위로 호른의 장엄한 선율이 겹치며, 나부코의 첫 페이지가 열렸다.
관객들은 숨소리조차 아끼며 귀를 기울였다.
서곡이 끝나고 고요가 내려앉은 뒤, 무대 뒤에서 규칙적인 발걸음이 들려왔다. 촛불을 든 서른 명의 합창단이 같은 리듬으로 걸어 나왔다.
"날아라, 그리움아, 황금의 날개를 타고"
촛불빛 아래 합창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잃어버린 아름다운 조국이여! 달콤한 기억과 쓰라린 눈물이 함께 깃든 땅이여!"
서른 개의 애절한 목소리가 층층이 쌓이며, 사무엘의 첼로 위로 내려앉았다.
로시의 호른은 그 울림을 넓게 감싸 안았고, 루치아의 피아노는 목소리와 현악기 사이를 비단실처럼 이어주었다.
그때, 루카의 오페라글라스에 비친 소중이에서 신비한 울림이 번져 나왔다.
어린 루카의 귀를 황홀하게 사로잡았던 성당의 첫 울림… 그 소리와 꼭 닮아 있었다.
『킨츠기처럼... 깨진 조각을 금빛으로 이어 붙인 듯한 소리』
루카는 순간 떠오른 영감을 재빨리 수첩에 옮겼다.
합창이 절정에 이르러, 서른 명의 목소리와 다섯 악기가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되어 공간 전체를 감쌌다.
"주께서 선율로 영혼을 감싸 주사
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그 힘을 우리 마음에 채워 주소서..."
마지막 기도가 울려 퍼지고, 서른 개의 목소리가 하나씩 사라져갔다. 호른의 마지막 숨결이 천장으로 스며들고, 첼로의 진동이 바닥을 타고 사라졌다. 루치아의 피아노에서 마지막 음이 떨어져 고요 속으로 녹아들었다.
바이올린의 선율이 천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극장 안이 고요해졌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고, 무대 위 연주자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요 속에서 서른 명의 목소리와 다섯 개의 악기, 수백 개의 심장이 남긴 울림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그때, 2층 발코니에서 박수 소리가 시작되어 극장 전체로 번져나갔다.
마르코가 소중이를 품고 인사했다.벨라, 사무엘, 로시, 루치아가 함께 일어났고, 합창단원들도 고개를 숙였다.
루카는 펜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수첩 마지막 줄에는 짧은 문장이 남았다.
"상처는 지나가고, 더 깊은 사랑만이 남았다."
박수가 잦아들고 막이 내려왔을 때, 관객들은 천천히 극장을 빠져나갔다.
밤이 깊어가는 베네치아의 거리에서, 라 페니체 극장의 불빛이 운하에 비쳤다. 물결이 그 빛을 부드럽게 흔들어댔지만, 그 깊은 곳에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소중이의 울림처럼, 상처받은 모든 것들의 노래처럼.
-끝-
(에피소드로 이어집니다.)
실내악 앙상블
소수의 연주자가 작은 공간에서 각자 독립적인 파트를 맡아 함께 연주하는 음악 형식으로, 대표적으로 현악 4중주가 있다. 협연(독주 협주곡)이 독주자와 오케스트라의 대비에 중심을 두는 반면, 실내악은 모든 연주자가 동등하게 대화하듯 어우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https://youtu.be/OtGfuT4kHPg?si=gWwYyeYsTVL4xaLf
베르디 「나부코」 (Nabucco, 1842)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대표 오페라 중 하나로, 바빌론 시대를 배경으로 유대인 포로와 바빌론 왕 나부코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특히 3막에 등장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Va, pensiero, sull’ali dorate”)**은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 고향과 자유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장면으로, 오페라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합창곡 중 하나이다.
라 페니체 극장 (Teatro La Fenice, 1792)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위치한 오페라 극장으로, 이름은 ‘불사조’라는 뜻을 가진다.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그때마다 재건되어 ‘불사조’처럼 다시 태어난 역사적 상징성을 가진다. 라 페니체는 베르디, 로시니, 벨리니 등 수많은 작곡가들의 오페라 초연 무대로 유명하며,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킨츠기(金継ぎ, Kintsugi): 깨진 도자기 조각을 금이나 은으로 이어 붙여 아름답게 복원하는 일본 전통 기법.
*창작노트*
올여름은 유난히 무더웠습니다.
그 뜨거운 시간 속에서, 저는 글을 쓰며 조용한 피서를 누렸습니다.
가슴속에서 흘러나오는 소중이의 이야기들이
마치 나무 그늘 아래 있는 듯한 안식을 주며, 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습니다.
지나온 시간 동안 마음속에 맴돌던 단어들이 하나둘 모여 이야기가 되어있었고, 올여름 그 이야기들이 밖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 펼쳐진 이야기들을 서랍에 정리하듯 하나하나 간추리면서,
사실 제가 가장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지나온 모든 시간이 실처럼 엮여 오늘의 나를 이루었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가 밀려왔습니다.
잠시 연재를 쉬고, 다시 돌아오려 합니다.
아직 남아 있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지만, 글이 충분히 익을 수 있도록 조금 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이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고,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즈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남겨주신 따뜻한 조언 덕분에 조금 더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눌러 주신 라이킷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정말 큰 힘이 되었다는 말씀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