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무대/ 크리스마스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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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1. 루카의 생일
2. 꽃잎을 어루만지듯
3. 조각난 꿈
4. 헐값에 팔린 꿈
5. 악몽
6. 공명
7. 한줄기 빛
8. 엘리
9. 소중이
10. 연주여행
11. 친구
겨울바람이 창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연습실에서, 소중이와 마르코는 첫 독주회를 위해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석양이 악보 위로 스며들어 음표 하나하나를 은은하게 물들였다.
"소중아, 마지막 곡으로는 뭐가 좋을까?"
마르코의 활이 현 위에서 조심스럽게 선율을 그어보았다. 몇 개의 음표가 공기 중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 이 곡은 아니구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마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파헬벨의 캐논은 어떨까?"
마르코의 활이 지나간 자리에 부드러운 공명이 일었다.
드디어 맞이한 독주회의 밤. 콘서트홀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지면서, 마르코는 무대 뒤 커튼 사이로 객석을 바라보았다. 가지런히 늘어선 벨벳 의자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찾아 앉고 있었다.
"소중아, 저기 봐. 우리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야."
긴장한 듯 소중이의 울림통이 살짝 떨렸다.
"괜찮아, 소중아. 우리 함께잖아."
마르코가 부드럽게 말했다.
커튼이 열리자 소중이는 어둠 속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느꼈다.
소중이의 현이 다시금 팽팽해졌다.
마르코가 소중이를 달래듯 목을 어루만진 뒤, 활을 살며시 현 위에 얹었다.
떨리던 첫 음이 홀 안으로 서서히 퍼지며 고요를 되찾았다.
한 줄 한 줄 선율이 안정을 되찾고, 드디어 마지막 곡 '파헬벨의 캐논'이 시작되었다.
마르코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음들이 부드럽게 겹치고, 또 겹쳐져 빛나는 화음을 그려냈다.
잠시 후, 박수가 파도처럼 퍼져 나가며 홀 안을 가득 메웠다.
박수 사이로 이사벨라의 따뜻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러분, 마르코와 소중이가 우리 모두에게 선사한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홀 안이 더욱 따뜻한 박수와 환호로 물결쳤다.
기차 창가에 서린 서리 너머, 마르코는 은빛으로 뒤덮인 세상을 바라보았다.
초청장을 손에 쥔 채 기차에서 내린 마르코의 얼굴에 크레모나의 차가운 공기가 스쳐갔다. 문득 눈 덮인 거리 한켠에서 소중이를 꺼내 들고 연주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소중아, 기억나지?"
거대한 대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수 세기를 견뎌온 프레스코화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린 시절 눈으로만 보던 성화들이, 살아 있는 듯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무대 위에 선 마르코가 소중이를 어깨에 올리며 속삭였다.
"우리가 이곳에 서게 되다니... 꿈만 같아."
고요한 공간 속으로 ‘G선상의 아리아’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G현에서 울리는 묵직한 선율이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깨웠다.
어린 루카가 작은 손으로 현을 어루만지던 생일, 성당 벤치에서 함께 음악을 듣던 평화로운 오후, 먼지 쌓인 악기상 구석진 자리, 베토의 거친 손길 속에서 견뎌낸 시간들, 그리고 자신을 '소중이'라 불러주던 마르코와의 만남까지.
선율이 지나간 자리마다 추억이 금빛 실로 이어져, 깊은 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울림이 성당의 둥근 천장을 타고 관객 사이로 조용히 번져 나갔다.
객석 뒤편에서 회색 코트를 입은 한 청년이 눈을 감고 바이올린 소리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아득한 그리움이 스며있었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그는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똑똑—
대기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고개를 든 마르코 앞에 단정한 코트 차림의 청년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바이올린을 잠깐 볼 수 있을까요?"
마르코는 소중이를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청년이 바이올린의 넥부분을 들여다보다가 작게 새겨진 글귀를 발견했다.
-루카에게-
"정말… 까칠이구나…"
"까칠이라고… 하셨나요?"
마르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릴 적 제가 지어준 이름이에요."
소중이의 f홀에서 바람소리가 스며 나왔다.
'보고 싶었어… 루카…'
루카가 눈을 감았다.
"소중이도… 당신을 그리워했나 봐요."
마르코가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요한 파헬벨, 《캐논 D장조》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1706)의 바이올린과 현악 앙상블을 위한 바로크 시대의 걸작. 부드럽고 반복되는 선율이 마음에 깊은 평안을 선사한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G선상의 아리아》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관현악 모음곡 3번 D장조 BWV 1068 중 2악장 '아리아'를 19세기 바이올리니스트 빌헬미(August Wilhelmj)가 편곡한 버전. 바이올린의 G 현 하나만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