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의 노래 11

친구

by yukkomi


https://brunch.co.kr/@yukyung2001/112

0. 프롤로그

1. 루카의 생일

2. 꽃잎을 어루만지듯

3. 조각난 꿈

4. 헐값에 팔린 꿈

5. 악몽

6. 공명

7. 한줄기 빛

8. 엘리

9. 소중이

10. 연주여행


친구


-로마행 기차


쇠바퀴가 레일을 굴러가는 규칙적인 리듬이 객실을 가득 채웠다.

에도아르도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악보 위 음표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멜로디를 읽었다. 악보 옆에 놓인 벨라도 그 손끝에서 퍼지는 리듬을 느꼈다.


건너편 좌석에서 마르코가 창유리에 이마를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중아... 아름답지."


마르코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퍼졌다. 창밖으로 초록빛 구릉이 물결치듯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 은빛 올리브 나무들이 점처럼 박혀 있었다. 에도아르도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 벨라도 잠시 그 풍경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후 내내 달린 기차가 로마 테르미니 역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 오래된 석재의 묵직한 냄새가 객실로 밀려들었다.


역사에서 나와 세르비우스 성벽을 따라 걷던 마르코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저쪽에서... 벤허가 전차를 몰고 달려 나올 것만 같아."


거대한 석주가 하늘을 받치듯 서 있었고, 흑백 TV로만 보던 고대 유적들이 손끝에 닿을 듯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순식간에 하늘빛이 잿빛으로 물들고, 이마 위로 ‘툭’ 하고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어서 쏟아지기 시작한 비.


"아, 내 재킷!"


에도아르도가 새로 산 모직 재킷을 재빨리 벗어 가슴에 감쌌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가까운 처마 아래로 뛰어갔다.

처마밑에서 숨을 고르던 에도아르도의 시선이 빗물이 스며든 벨라에게 향했다.


"벨라! 미... 미안해!"


바로 옆에서는 소중이가 마르코의 재킷에 감싸인 채 그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


연습실에서는 밤이 늦도록 에도아르도의 활이 벨라의 현 위를 오갔다. 창밖으로는 마르코가 소중이를 옆구리에 끼고 천천히 거리를 거닐며, 스케치하듯 로마의 풍경들을 마음에 담고 있었다.



-부엉이의 집


며칠 후, 톨로니아 빌라 입구에서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마르코와 에도아르도의 발소리가 대리석 회랑을 따라 메아리쳤다. 회랑 끝에 곡선 지붕과 모로코풍 푸른 타일로 장식된 작은 궁전이 숨어 있었다.


저녁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든 건물 안, 부엉이와 나비, 담쟁이덩굴이 새겨진 색유리창이 바닥 위로 무지갯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라사테의 「집시의 노래」

에도아르도의 활 끝이 벨라의 현을 스치는 순간, 선율이 오선지를 벗어나 자유롭게 춤추기 시작했다. 빠르고 복잡한 구절을 지나던 중, 에도아르도의 비브라토를 벨라가 살짝 놓치고 말았다. 벨라의 나무 몸통이 살짝 흔들렸다.


관객들의 시선은 여전히 무대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박수소리가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하지만,

벨라의 나뭇결은 빛을 잃고 어두워졌다.

그때, 에도아르도가 벨라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벨라의 f홀에서 짧은 숨이 흘러나왔다.


이틀 후,

에도아르도는 오래 알고 지낸 악기상을 찾았다. 벨라는 에도아르도의 품에 안긴 채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은은하면서도 각기 다른 빛을 내는 현악기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검은 턱수염을 기른 주인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가 자물쇠로 잠긴 유리 진열장을 열고 황금빛이 도는 바이올린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였다.


"에도아르도,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17세기 오스트리아 명장의 악기예요. 한번 소리를 들어보세요."


에도아르도가 바이올린을 어깨에 기대고 활을 올렸다. 활이 현에 닿자 맑고 투명한 소리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참 맑은 소리군요. 벨라와는 또 다른 목소리네요."


"원하신다면 후원자를 연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에도아르도가 고개를 저었다.


"감사하지만, 제겐 벨라가 있어요."


벨라 안으로 편안한 울림이 퍼졌다.


악기상을 나온 후, 두 청년은 트레비 분수 앞 야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벨라는 둥근 테이블 위에 눕혀진 채 분수에서 솟구쳐 올라 하늘로 흩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마르코가 무릎 위의 소중이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모습을 보며 에도아르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너희 둘 보면서... 벨라한테 참 미안했어.

벨라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


"어떻게 만났어요?"


마르코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에도아르도가 벨라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열 살 때 지휘자셨던 할아버지가 벨라를 물려주셨어. 그때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에도아르도야, 이 바이올린은 네 평생의 친구가 될 거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렴.'"


벨라는 작은 손으로 서툴게 활을 켜던 어린 에도아르도의 모습을 떠올렸다.


에도아르도의 목소리가 잠깐 멈춰 섰다.


"사춘기 때는... 벨라와 헤어져야만 했어. 3년 동안. 군악대에서 트럼펫을 불어야만 했지."


벨라는 에도아르도의 손길이 사라진 채 어둠 속에서 기다려야 했던 긴 시간들을 떠올렸다.


"다시 만났을 때... 서로가 낯설었어. 음악을 포기할 뻔했지. 그런데 어느 날 잠이 오지 않던 밤에..."


벨라는 그 순간을 기억했다. 달빛이 얇은 커튼 사이로 스며들던 밤, 에도아르도의 떨리는 손가락이 자신의 현을 살며시 건드렸을 때의 그 미세한 울림을.


"그때부터 조금씩 벨라와 다시 대화를 시작했어."


마르코가 품속의 소중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비분수의 물줄기가 햇살 속에서 은빛으로 흩어지며 무지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밀라노 가는 길


밀라노행 기차 좌석에서 벨라와 소중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기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두 바이올린이 기울어지며 서로에게 가까워졌다. 벨라는 소중이에게서 아직 배어있는 니스의 달콤한 냄새를 맡았고, 소중이는 벨라에게서 풍겨오는 오랜 세월의 향기를 느꼈다.


밀라노에 도착한 두 청년이 두오모 성당 앞 광장에 우뚝 섰다. 목을 뒤로 젖히고 올려다본 첨탑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두오모 광장에서 몇 블록 떨어진 콘서트홀로 들어서자 은은한 소나무향이 코끝에 와닿았다. 진한 나무색 객석들이 무대를 둥글게 둘러싸며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두 바이올린이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에도아르도의 활이 벨라의 현 위를 미끄러지자 서정적인 선율이 홀 안을 감쌌다. 곧이어 마르코의 활에서 소중이의 따뜻한 화음이 피어올랐다.

벨라가 멜로디를 그려내면 소중이가 그 아래에서 받쳐주었고, 소중이가 중음을 울려내면 벨라가 그 위에서 섬세한 장식을 수놓았다.


그런데 곡이 절정으로 치달으며 높은음을 향해 올라가던 바로 그 순간—


"지-잉!"


벨라의 E현이 팽팽함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져버렸다. 홀 안에 갑작스런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숨죽인 듯한 순간이 지나고, 객석에서 격려의 박수가 하나둘 터지기 시작했다. 작은 박수 소리가 점점 커져 홀 전체로 번져나갔다.


에도아르도의 따뜻한 눈빛이 벨라를 향했다. 벨라는 깊게 호흡을 고르고, 남은 세 개의 현으로 새로운 선율을 띄워 올렸다. 소중이가 즉시 벨라를 감싸며 풍성한 하모니를 만들었다.


세 현이 만들어낸 새로운 떨림과 소중이가 그 위에 쌓아 올린 화음이 한층 깊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E현이 사라진 자리에 두 바이올린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감동적이었다.


마지막 화음이 공기 중에 머물다 천천히 사라져 갔다. 잠시의 고요 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홀 안을 뒤흔들었다.


"브라보! 앙코르!"



그날 밤.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와인잔을 손에 들었다.

창밖으로는 가을비가 은실처럼 내리고 있었다.

벨라와 소중이는 의자에 나란히 기대어,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벨라도 새 친구가 생긴 게 좋은가 보네.”


에도아르도가 벨라의 현을 살짝 튕기자,

소중이가 낮은 울림으로 화답했다.


흘러내리는 빗방울 너머, 멀리 두오모의 황금 마리아상이

네 친구를 따스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라사테, 《집시의 노래》(Zigeunerweisen, Op. 20)
파블로 데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1844–1908)는 스페인의 바이올린 거장으로, 《집시의 노래》는 1878년에 작곡된 바이올린 독주곡이다. 헝가리 민속 음악과 스페인 집시 음악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바이올리니스트의 기교를 최대한 발휘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열정적이고 자유로운 감정을 표현한다.



엘가, 《사랑의 인사》(Salut d’Amour, Op. 12)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1934)는 영국의 작곡가로, 《사랑의 인사》는 1888년에 연인 캐롤라인 앨리스 로버츠(Caroline Alice Roberts)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원제는 독일어 'Liebesgruss'였으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은 낭만적 곡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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