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이/연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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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1. 루카의 생일
2. 꽃잎을 어루만지듯
3. 조각난 꿈
4. 헐값에 팔린 꿈
5. 악몽
6. 공명
7. 한줄기 빛
8. 엘리
9. 소중이
9. 소중이
붉은 벽돌이 쌓아 올린 크레모나 시청사 아래, 끝없이 이어지는 아치형 회랑은 오후 햇빛을 부드럽게 걸러내며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채 복도를 걸어가던 마르코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수리는 잘 끝났지만... 이제 연주자의 손에서 잘 어우러져야 합니다."
엘리 할아버지의 따듯한 당부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제 넌 '소중이'야. 내가 너를 정말 소중히 여길 거야."
나지막한 마르코의 목소리가 나무 결을 따라 바이올린에 스며들었다.
데엥 뎅 —
그 순간, 토라조의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광장 가득 퍼져 나갔다.
종소리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마르코는 이사벨라 빌라에서 열리는 후원 음악회에 초대받았다.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쏟아내는 화려한 빛 아래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후원자들이 우아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을 올해 차석으로 졸업한 에도아르도를 소개합니다."
샹들리에 불빛이 에도아르도의 바이올린 '벨라'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그가 활을 들어 올리자 홀 안이 고요해졌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활 끝에서 시작된 첫 음이 홀 안으로 서서히 번져갔다. 벨라의 활이 현 위를 질주하더니, 순간 두 음이 겹쳐져 울리며 마법 같은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왼손의 비브라토가 선율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오선지를 뚫고 나온 음표들이 공간속을 춤추듯 날아다녔다.
곳곳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연주가 끝나자 물결처럼 퍼지던 박수가 한참 후에야 잦아들었다.
마르코의 차례,
마르코는 소중이를 가슴에 살짝 끌어안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홀 안의 조명이 모두 꺼지고 촛불 모양의 벽등만이 은은한 빛을 드리웠다.
마르코가 활을 부드럽게 끌어 올리자, 슈베르트 '세레나데'를 노래하는 소중이의 첫 음이 공기 중에 피어올랐다.
그 소리는 달빛에 일렁이는 호수의 물결처럼 천천히 밀려왔다. 그리고 은빛 여운을 남긴 채 고요 속으로 사라져 갔다.
객석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고, 누군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연주가 끝나고, 이사벨라가 미소를 머금고 다가왔다.
"마르코, 당신의 연주를 들으니 왜 그 바이올린을 '소중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아요."
몇 달 후,회색빛 안개가 층층이 내려앉은 밀라노 카르카노 극장 앞. 마르코는 가로등의 흐릿한 불빛에 의지해 극장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극장 안에서는 바이올린 협연을 위한 오디션이 치러지고 있었다. 이사벨라의 음악회 이후 마르코에게 주어진 첫 번째 기회였다.
하지만 이사벨라 빌라에서의 그 편안하고 따뜻한 울림은 어디로 갔을까...
차가운 무대 조명 아래에서 '루마니아 환상곡'을 연주하는 소중이의 현은 마치 바람에 휘청이는 촛불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르코는 소중이를 품에 꼭 안고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떨리는 손끝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심사위원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수고하셨습니다."
짧은 한마디가 공간을 가르며 떨어졌다.
마르코와 소중이는 무거운 마음으로 무대를 내려왔다.
"괜찮아. 우리 처음이잖아."
다음 날 아침,
뿌연 안개는 걷히고 맑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겨울바람이 손끝을 시리게 했지만, 마르코와 소중이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눈이 흩날리는 날에는 브레라 예술대학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볕이 좋은 날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이는 나빌리오 그란데 다리 위에서 바이올린의 여백을 채워 나갔다.
교회당의 은은한 종소리, 벽난로 안의 장작이 타닥거리는 소리, 눈길 위의 발자국 소리... 밀라노의 모든 소리가 소중이 안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겨우내, 반짝이던 날들과 안개처럼 흐릿하던 날들이 실처럼 차근차근 엮여 가며 두 영혼을 하나로 이어주었다.
-베네치아의 물결
이듬해 여름, 이사벨라는 마르코를 에도아르도의 연주 여행에 동행시켰다. 이탈리아 전역을 도는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아드리아해의 에메랄드 물결 위에 떠 있는 꿈의 도시, 베네치아였다.
마르코 일행을 태운 곤돌라가 물살을 가르며 산 마르코 광장으로 다가갔다. 오후 햇살을 받은 산 마르코 성당의 황금 모자이크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눈부신 빛을 등지고 마르코와 이사벨라는 리알토 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위에서,노을에 붉게 물든 대운하를 뒤로한 채, 에도아르도가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활이 거센 폭풍처럼 벨라의 현을 밀어내자, 폭우 같은 웅장한 울림이 아치형 회랑 사이로 메아리쳤다.
소중이의 몸통 깊숙이에서 미묘한 진동이 일렁였다.
“소중아, 너도 특별한 소리를 가지고 있어.”
마르코가 붉어진 소중이 나뭇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순간, 벨라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더니 몸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르네상스의 도시 플로렌스
플로렌스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도시가 황금빛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코는 우피치 미술관을 나와 베키오 다리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발아래로는 아르노 강이 은색 비단띠처럼 흐르고 있었다.
피티 궁전까지 이어진 바사리 회랑을 바라보던 마르코의 시선이 근처 작은 광장으로 향했다. 에도아르도가 그곳에서 바이올린을 꺼내고 있었다.
벨라의 소리는 여전히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소중이는 그 현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휴식 시간, 햇살이 스며든 카페테리아에 두 바이올린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소중이는 따뜻한 진동을 만들어, 긴장한 벨라 쪽으로 조심스레 흘려보냈다.
하지만 벨라의 현이 날카롭게 떨며 몸을 비틀었다. 마치 고개를 치켜세우듯, 스크롤 옆에 새겨진 과르네리우스의 문장이 차갑게 반짝였다.
며칠 후, 미켈란젤로 광장에서의 연주가 있었다. 석양이 플로렌스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인 그 순간, 마르코가 물결을 그리듯 부드럽게 활을 그었다.
소중이에게서 흘러나온 깊고 따뜻한 선율이 사람들의 마음 깊숙한 곳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한 할머니가 치맛자락으로 눈가를 눌렀고, 광장을 뛰어다니던 어린아이도 엄마 품으로 달려와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르코와 소중이는 서로를 따듯하게 바라보며 숨을 맞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라의 몸통이 미묘하게 떨렸고, f홀 끝에서 탁하고 불안한 진동이 새어 나왔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1840)는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거장으로, 그의 카프리스(24개의 변주곡)는 바이올린 기교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24번 카프리스는 특히 기술적 난이도가 매우 높아 ‘마지막 카프리스’로 불리며,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에게 영감을 주었다.
슈베르트 '세레나데'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곡가로, 그의 ‘세레나데(D.957 No.4)’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로 사랑받는 가곡이다.
루마니아 환상곡
게오르게 에네스쿠(1881–1955)가 루마니아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작곡한 대표적 관현악곡이다.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선율로 널리 사랑받는다.
과르네리우스(Guarnerius): 17~18세기 이탈리아 크레모나의 명장 과르네리 가문이 만든 바이올린으로, 스트라디바리우스와 함께 세계 최고의 명기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