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기빛
0. 프롤로그
1 루카의 생일
2. 꽃잎을 어루만지듯
3. 조각난 꿈
4. 헐값에 팔린 꿈
5. 악몽
6.공명
잿빛 하늘이 산타마리아 광장 위로 드리워졌다. 부챗살처럼 펼쳐진 돌바닥에는 아직도 전쟁의 그을음이 검게 남아있었다.
차가운 공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카페테라스로 나와 앉았다. 무릎 위에 담요를 덮고 손에는 뜨거운 에스프레소 잔을 들며 봄의 향기를 천천히 들이마셨다.
겨우내 한 뼘씩 자란 가지 끝에 연한 잎들이 살랑이는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서 마르코가 활을 올렸다.
"마스네, 타이스의 명상곡입니다."
마르코의 활이 G선 위를 부드럽게 스치자 낮고 깊은 음이 흘러나왔다. 활 끝에서 피어나는 숨결 같은 떨림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발걸음을 멈췄다.
목발을 짚은 한 남자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마르코 앞에 섰다. 굳은 표정 아래로 빛바랜 훈장이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헝클어진 머리의 어린 소녀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엄마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마르코의 선율이 광장 앞을 지나던 이사벨라 백작부인의 귓가에도 스며들었다.
베일 아래 깊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마르코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툴지만 정성스러운 운지법과 살짝 떨리는 보잉. 하지만 그 사이로 포화 속에서 금이 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처럼 깊고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의 그림자가 하나둘 흩어져갔다. 이사벨라가 마르코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
"차 한 잔 함께 하시겠어요?"
그녀가 정중하게 명함을 건넸다. 진주빛 종이 위에 금박으로 '베르디 후원재단 이사벨라 콘테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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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건디색 차양이 드리운 테라스 카페. 길게 기운 오후 햇살이 테이블 위로 쏟아지고, 갓 내린 커피의 진한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잔 사이로 마르코의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때로는 숨 가쁘게 흘러나왔다. 그의 손끝이 찻잔 손잡이를 천천히 감싸 쥐었다.
"마르코, 당신의 연주에서 깊은 위로를 받았어요."
"저 같은 사람의 연주에서 말인가요?"
"물론입니다. 당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석 같아요. 당신을 후원하고 싶습니다."
**마스네 – 타이스의 명상곡**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Jules Massenet)가 작곡한 오페라 《타이스》의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곡으로 마음의 갈등과 평화를 동시에 담아내는 곡이다.
봄의 따스한 햇살 아래 벚나무 가지마다 연분홍 꽃망울들이 하나둘씩 피어나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마르코와 함께 도시 외곽의 오래된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Via del Suono(소리의 거리)
긴 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장인들이 몇 년 전부터 굳게 닫았던 작업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의 활기는 사라졌지만, 낡은 벽돌 사이와 창문 틈새로 희미한 현악기 선율이 스며 나왔다.
골목 끝자락에는 담쟁이넝쿨이 벽을 감싸고 있는 작은 바이올린 수리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색 바랜 나무 간판에는 '바이올린 장인 – Eli Rossi'라는 글씨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나무문을 밀고 들어서니 진한 가문비나무와 단풍나무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벽면에는 오래된 활과 바이올린 틀들이 정갈하게 걸려 있고, 작업대 위로는 각종 연장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유리창 아래 책상에서는 니스가 마르고 있는 바이올린이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사벨라와 엘리 할아버지 사이에 간단한 인사가 오갔다.
엘리 할아버지의 손가락이 바이올린 표면을 천천히 따라 움직였다. 거친 부분에서는 잠시 멈춰 서고, 패인 곳은 살며시 눌러보았다.
돋보기 너머로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어린 생명을 보살피는 듯한 따뜻함이 스며 있었다.
엘리는 바이올린의 뒤판을 자세히 살피고, 다시 옆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 아이가 참 힘든 시간을 보냈군요."
"정말 잘 만들어진 바이올린이네요. 가문비나무 결이 이렇게 고르고... 뒤판의 단풍나무 불꽃무늬도 이토록 아름답고요. F홀도 완벽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만 이 아이는 상당히 예민해서 조금만 거칠게 다뤄도 금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죠.
하지만 그만큼 정성스럽게 보살펴 준다면 누구보다 깊고 아름다운 소리를 선사할 겁니다."
엘리 할아버지가 몸통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정성스럽게 다듬어지면 이 아픔의 흔적들도 아름다운 음색으로 거듭날 거예요."
바이올린은 그렇게 엘리 할아버지의 작업실에 맡겨졌다.
작업실에서의 첫날밤, 할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많이 힘들었지?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가 다 고쳐줄 테니까."
하지만 바이올린의 몸통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고, 현들도 팽팽하게 당겨진 채였다.
'마르코가... 가버렸어...'
까칠이의 현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음날 이른 아침, 황동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문이 열렸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마르코가 들어섰다.
"까칠아, 걱정하지 마. 치료 잘 받고 우리 곧 다시 만나자."
마르코의 목소리가 들리자 바이올린에서 미세한 소리가 났다. 아마도 현이 살짝 느슨해진 소리였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작업은 공예품을 빚어내듯 시간을 천천히 녹여가며 이루어졌다.
매일 아침 엘리는 바이올린을 꼼꼼히 살피며 어느 부분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고민했다.
오랜 고민 끝에 작업이 시작되었다.
엘리는 따뜻한 증기를 조금씩 쐬어주며 굳어버린 바이올린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왔다.
나무가 어느 정도 부드러워지자 작은 클램프를 비틀린 부분에 조심스럽게 고정했다. 서서히 압력을 가하니 나무가 점차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어느새 창가를 화사하게 물들였던 분홍 꽃잎들은 떨어지고, 그 자리에 작은 열매들이 맺혔다.
엘리 할아버지는 고운 나무 가루와 투명한 접착제를 섞어 까칠이의 상처를 정성스럽게 메워나갔다.
꼬박 한 달이 지난 후,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의 나뭇결 위에 정성을 다해 칠을 올렸다.
엘리의 어깨 위로 햇살을 머금은 바이올린이 물결처럼 반짝였다.
할아버지가 활을 들어 천천히 현을 그어내자 깊은 소리와 함께 미세한 잡음이 흘러나왔다.
부끄러운 듯 바이올린 뒤판의 단풍나무 결이 붉게 변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런 잡음 같은 떨림들이 큰 연주장에서는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단다."
할아버지는 다시 활을 들어 부드럽게 선율을 끌어올렸다.
현위의 미세한 떨림이 브리지를 타고 울림통 깊숙이 스며들었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깊고 풍부한 울림이 f홀을 가득 채웠다.
"그래, 이게 바로 진짜 네 목소리구나."
거칠고 답답했던 울림은 사라지고, 깊고 부드러운 선율이 오래된 창을 넘어 퍼져나갔다.
창밖의 나뭇잎들이 그 소리에 살며시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