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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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1 루카의 생일
2. 꽃잎을 어루만지듯
3. 조각난 꿈
4. 헐값에 팔린 꿈
5. 악몽
크레모나 외곽, 비아 무지카(음악의 거리) 입구에 서있는 바이올린 조각상.
청동 명판에는 ‘과르네리우스의 고향’이라는 글귀가
고풍스럽게 새겨져 있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돌길 위를 한 청년이 걷고 있었다.
마르코. 한때 바이올린 신동이라 불렸던 청년은 이제 새벽 안갯속에서 낡은 작업복을 꺼내 입고, 벽돌과 모래가 쌓인 현장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이봐, 저기 좀 치워!”
“어이, 밥 먹고 빨리 와!”
어디에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없다.
한때 바이올린 활을 쥐던 손은 이제 모래포대를 들어 올리고 쓰레기를 치운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는 이곳을 떠날 수 없었다.
추운 겨울에도 꺼지지 않던 연습실에서의 추억과, 악기점 유리창에 붙은 포스터를 보며 꿈을 키우던 소년 시절의 기억이 그를 붙잡았다.
비 오는 날, 건설 현장이 멈춰 서면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마르코의 레인 코트 안으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고, 마르코의 걸음은 어느새 '비아 무지카'로 향해 있었다.
오래된 악기상 앞,
빛바랜 버건디색 차양막 아래에서 한참 동안 쇼윈도를 바라보던 마르코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손때가 묻은 옅은 베이지색 지갑에서 잘 정돈된 지폐 몇 장을 꺼내며 물었다.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바이올린이 있을까요?"
가게 주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선반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까칠이를 꺼내왔다.
"음, 이 돈으로는... 이 아이밖에 없네요. 잘 만들어진 녀석인데 주인을 잘못 만났어요."
마르코가 바이올린을 받아 들었다.
몸통의 바니시가 곳곳에 벗겨지고,
f홀 주변에는 먼지가 쌓여있었다.
뒤판 곳곳의 크고 작은 흠집이 지나간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많이... 힘들었구나..."
손끝으로 바이올린의 흠집을 짚던 그의 시선이 자신의 거친 손등에 한동안 머물렀다.
마르코가 활을 현위에 살짝 올려 첫소리를 내어보았다.
"끼이—익"
빗장을 걸어 잠근 까칠이에게서 갈라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소리가 마르코의 마음과 맞닿아 있었다.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
"함께... 살아보자."
창밖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든 방 안에서, 그는 조심스럽게 바이올린을 꺼냈다.
"어릴 때 바이올린이 하나 있었어."
마르코가 바이올린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내가 태어나던 해에 선물해 주신 거였어. 내 이니셜이 새겨져 있어서 그 아이를 '마르코'라 불렀지."
까칠이는 마르코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친구도 처음엔 나를 경계했어. 너처럼 말이야. 하지만 매일 함께 하다 보니 서로를 알게 됐지."
마르코는 부드러운 솔로 f홀 주변의 먼지를 털어내고, 부드러운 헝겊으로 바이올린을 닦아주었다.
송진 덩어리를 활털에 천천히 문지른 후 손가락으로 하얀 가루를 털어내고, 활 끝에 있는 나사를 풀어 편안한 곡선으로 만들었다.
"많이 긴장하고 있었구나. 힘들었다면 미안해."
현을 교체할 때도 낯선 손길을 경계하는 고양이를 쓰다듬듯 조심스러웠다.
"천천히 해볼게. 이 현은 어때?"
마르코는 활을 E현에 올리고 부드럽게 밀었다.
테일피스에 달린 은색 나사를 살짝 풀며, 현의 장력을 미세하게 조절했다.
마르코의 따듯한 손길이 닿자, 얼어붙었던 까칠이의 울림통이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마르코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그 친구를 떠나보내야 했어.
그 이후로는 바이올린 소리를 멀리했지. 아니… 잊으려 애썼어..."
마르코의 떨리는 목소리에,
바이올린 안쪽에서 여리지만 묵직한 울림이 퍼져 나왔다.
넉 달쯤 지났을까...
조금씩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햇살이 조용히 방 안을 감싸고 있던 낮시간, 까칠이는 아직은 낯선 편안함 속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문이 덜컥, 낯선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공사장에 있어야 할 마르코가 숨을 가쁘게 들이쉬며 들어섰다.
그의 꽉 쥔 손 안에는 구겨진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는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활을 거칠게 그었다.
까칠이의 현이 순간 느슨해졌다가, 다시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 차가운 눈초리, 거친 손길, 무례한 말들…
묵은 먼지가 터지듯, f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구쳤다.
‘마르코... 당신도 별 수없군요...'
마르코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활을 내려놓았다.
"미안해."
마르코가 바이올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린 시절 내 바이올린한테도 그랬어.
연주가 잘 안 될 때... 그때 그 친구가 얼마나 놀랐을까......"
마르코의 목소리가 흔들리자, 까칠이의 울림통이 작게 진동했다.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야."
마르코는 바이올린의 거친 숨이 잦아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까칠이는 스스로 진동을 만들어내며 숨 고르기를 했다.
한참을 지난 후, 줄감개가 스르르 돌아가며 긴장을 풀었다.
까칠이의 음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마르코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활을 다시 들었다.
조심스럽게 레가토로 현을 켰다.
끊어졌던 음이 하나하나 부드럽게 이어졌다.
까칠이는 활이 지나간 자리에 부드럽고 맑은 음을 남겼다.
드디어
어긋났던 음들이 제자리를 찾고, 둘의 마음이 물결처럼 이어졌다.
서로의 상처를 아는 둘 사이에
조용한 슬픔의 공명이 시작되었다.
레가토(Legato) :
활을 끊지 않고 음과 음을 부드럽게 연결하여 매끄럽고 흐르는 듯한 선율을 만드는 기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