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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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1 루카의 생일
2. 꽃잎을 어루만지듯
3. 조각난 꿈
4. 헐값에 팔린 꿈
들키고 싶지 않은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 채 까칠이는 쇼윈도 구석진 자리에 놓여 있었다.
햇살은 부드러웠지만 까칠이는 여전히 구석진 그늘에 몸을 숨겼다.
고맙게도, 햇살은 빛바랜 유리창에 길게 머물렀다.
까칠이의 굳게 얼어 있던 마음에도,
조금씩, 봄의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오지 않을까?'
골목을 비추던 가게 불빛이 하나, 둘 꺼지며, 골목 끝까지 어둠이 스며든 저녁.
악기상 주인이 쇼윈도 불을 끄고 문 한쪽의 자물쇠를 돌리려던 순간, 반대쪽 문이 덜컥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베토...
아코디언을 걸친 그의 어깨는 기울어 있었고 옷에서는 거리의 먼지와 독한 술 냄새가 뒤섞여 풍겨 나왔다.
쇼윈도의 악기들이 수군거렸다.
"저 사람이 누구를 데려갈까?... 무서워..."
"걱정 마. 저런 사람은 값싼 악기만 찾을 테니까..."
구릿빛 광택이 나는 비올라가 까칠이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나도... 다 들린다고!"
까칠이의 현이 떨리며 작은 진동을 보냈지만, 다른 악기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주인양반, 싸고 쓸만한 바이올린 없소? 아코디언만으로는 벌이가 영 시원찮아서..."
가게 주인이 다시 불을 켜고 쇼윈도구석에서 까칠이를 꺼냈다.
"이게 바디가 좀 긁혀서 그렇지만 소리는 좋습니다. 상당히 공들여 만든 악기거든요."
"상관없소. 거리에서 쓸 건데 뭐."
베토는 까칠이를 대충 훑어보더니 구겨진 돈뭉치를 툭 내밀었다. 그의 손가락마디는 오래된 나무껍질처럼 굳어있었다.
"휴..., 다행이다."
쇼윈도의 악기들이 작게 속삭였다.
까칠이는 베토의 허름한 가방 안에 밀어 넣어졌다. 가방 안은 쿰쿰한 냄새가 진동했다.
'내가 잘하면... 돼.'
까칠이는 베토의 손에 이끌려 빈민가 한복판, 벽돌 건물의 3층 꼭대기 다락방으로 향했다.
계단 한편에 쌓인 쓰레기 더미 위로 고양이가 앉아 있었고, 복도에는 빈 술병들이 아무렇게나 뒹글고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고양이 루초가 따라 들어왔다.
베토는 까칠이를 소파 옆에 툭 던져 놓았다.
생선구이와 양배추 피클을 저녁으로 먹은 베토는 남은 생선을 신문지 위에 올려 루초에게 밀어주었다.
"루초, 내가 한곡 연주해 줄까?"
그는 증류가 덜 된 와인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는 까칠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굳은살 박인 손이 활을 거칠게 밀어냈다.
'아파....'
' 아직 나를 잘 모르니까...
내가 더 노력하면 돼.'
그날 이후,
길거리 연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까칠이는 늘 소파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베토가 그를 꺼내는 건 오직 거리에서 연주할 때뿐이었다.
베토는 까칠이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자, 오늘도 구슬픈 소리나 내자고."
높이 솟은 토라초의 종소리가 미사의 끝을 알리자,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이 새겨진 성당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물결처럼 흘러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베토는 '차르다시'를 연주하기시작했다.
구슬픈 선율에 이끌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베토는 몸을 앞으로 숙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동전이 모자에 떨어질 때마다 베토는 더 과장되게 연기했다.
굳은 손가락이 현을 눌러 비틀 듯 비브라토를 주었다.
송진기운 빠진 활은 현 위를 난폭하게 오갔다.
'이건... 비브라토가 아니야.'
까칠이의 현들에서 찢어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은 하나둘 상처를 입어갔다.
'조금만 더 참아보자.'
하지만...
베토는 혹사당한 까칠이를 신발장 옆에 던져두고는 이내 잊어버렸다.
길거리 고양이 루토조차 까칠이 옆에는 오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 까칠이는 스스로 작은 울림도 만들 수 없을 만큼 메말라갔다.
'이 사람은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이 없어.'
오랫동안 참아온 들숨이 어느새 거친 날숨으로 바뀌어 갔다.
베토가 살짝만 힘을 주어 현을 짚어도, 까칠이는 날 선 철사처럼 삐딱한 소리를 냈다.
오랫동안, 둘 사이는 삐걱거렸다.
연일 내리는 비로 길거리 연주가 멈춰 선 날, 베토는 하루 종일 술을 마셨다.
비틀거리며 돌아온 그의 얼굴엔 분노가 가득했다.
고양이 루초가 등을 굽히고 슬그머니 문틈으로 빠져나갔다.
"빌어먹을 바이올린 같으니라고! 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베토가 까칠이를 벽에 내던졌다.
'쾅!'
'차라리 가게에 있는 편이 나았어...'
베토는 더 깊이 술에 빠져 갔다.
그의 연주는, 갈피를 못 잡는 나뭇잎 같았다.
미사에서 은총을 입고 나온 부인들조차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끝없이 내리던 겨울날, 베토는 따뜻한 술 한 잔을 위해 까칠이를 또다시 중고 악기상에 되팔았다.
"저런 사람한테 너를 판 게 미안해서 안 받을 수는 없었지만, 너도 이젠 너무 상했구나."
주인은 한숨을 쉬며 까칠이를 가게 구석 높은 선반에 얹어놓았다.
새로 자리 잡은 쇼윈도의 악기들이 차가운 눈초리로 까칠이를 바라봤다.
"저렇게 망가진 걸 누가 사겠어?"
새로 온 만돌린이 말했다.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서 반짝이는 바이올린도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쓸모없는 바이올린이야.'
까칠이는 조개가 모래를 삼키듯 슬픔을 삼키며 스스로를 닫아버렸다.
이따금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이 공기를 타고 흘러들 때면, 까칠이는 더욱 초라해졌다.
'저렇게... 나도 저렇게 노래하고 싶었는데.'
어린 루카를 처음 만나던 날을 생각하며 까칠이는 고개를 떨궜다.
몇해를 넘긴 계절의 끝,가늘게 내리는 빗줄기가 비아무지크의 돌길을 적셨다.
낡은 레인코트의 깃을 세운 청년이 빛바랜 차양막 아래서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https://youtube.com/watch?v=vflWkL8ygsQ&si=-l3FRqnmvuDgno0_
차르다시(Czardas): 헝가리 전통 무곡으로, 느린 라산과 빠른 프리스카로 구성된다. 몬티의 바이올린 곡 《차르다시》(1904)는 이를 바탕으로 한 대표적 작품이다.
비아무지크: 음악의 거리
토라초:이탈리아 크레모나의 ‘토라초’는 13세기 완공된 중세 종탑으로, 두오모 성당과 함께 도시의 중심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