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의 노래 3,4

by yukkomi

1. 루카의 생일

2. 꽃잎을 어루만지듯

https://brunch.co.kr/@yukyung2001/112

3. 조각난 꿈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 돼!"

루카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바이올린을 연습했다. 연습일기를 써가며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려 애썼다.

8월 15일
오늘 32번 연습함. 음정 18번 틀림.

G선에서 또 삐걱거림. 활 압력 조절 실패.
→ 내일은 G선 집중 연습!

8월 17일
35번이나 했는데 소리가 엉망.

활 누르는 힘 조절이 너무 어렵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날의 오후. 창밖의 풍경도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방 안에는 메트로놈 소리만 가득했다.

째깍, 째깍, 째깍.

메트로놈은 변함없이 정확한 박자를 세고 있었지만, 루카의 바이올린 소리는 여전히 어제와 같았다.

시간은 앞을 향해 달려가는데 루카만 그 자리에 멈춰 선 듯했다.

가끔은 바이올린이 듣기 좋은 소리를 내주었다. 그럴 때면 루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조금 후면 다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처럼, 한 소절의 행복은 금세 사라졌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바이올린 소리에 화가 난 루카는 결국 까칠이를 활로 툭 쳤다.

겁을 먹은 까칠이는 현을 바짝 조였다.

그러자, 날카롭고 탁탁 끊기는 소리가 났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루카의 인내심도 서서히 말라 갔다. 마른 가지처럼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오늘은 반드시 완벽하게 연주할 거야!"


하지만 첫 음부터 갈라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카는 더 세게 현을 지판에 눌렀다.

까칠이는 상처가 건드려진 새끼 고양이처럼 날카롭게 하악거렸다.


"왜 안 되는 거야! 분명히 정확한 음정인데! 내가 이렇게 연습했는데!"


참았던 마음이 터져 나온 루카는 까칠이를 침대에 던져버렸다.

바이올린이 침대머리에 부딪히며 둔탁한 '쿵' 소리를 냈다.

순간, 까칠이의 마음도 툭, 떨어져 내렸다.



며칠 후,

루카의 아버지가 영국 출장에서 돌아오셨다. 아버지 손에는 커다란 선물상자가 들려 있었다.

영국에서 유행하는 조립식 철제 키트였다.

볼트와 너트, 바퀴, 나사... 미지의 조각들이 상자 안에 가득했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루카의 눈동자에, 오랜만에 생기가 돌았다.

그날 저녁, 루카는 조립 설명서를 읽으며 부품 하나하나를 맞춰 나갔다.

철제 부품이 ‘딸깍’ 하고 맞춰지고, 나사가 나선을 따라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는, 마치 음표들이 정확히 제자리를 찾는 것처럼 루카의 귀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날 이후, 까칠이는 방 한구석에 놓인 채 잊혀 갔다. 창밖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듯, 루카의 마음도 가을바람에 실려 멀어져 갔다.

까칠이는 그저 켜볼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까칠이는 작은 떨림을 만들며 루카의 마음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가끔씩 루카가 조립에서 실수할 때면 작은 기대를 품은 까칠이의 현이 조용히 들썩거렸다.

하지만, 루카는 잘못 맞춰진 전차를 모두 해체한 뒤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완성된 전차를 본 루카의 입가에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나도...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해 겨울,
긴 겨울방학에 지루해하는 루카를 위해 어머니는 친구 몇 명을 초대해 주셨다. 오래간만에 신이 난 아홉 살 사내아이들은 눈 쌓인 마당에서 신나게 뛰어놀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꽃처럼 피어났다. 그러다, 마시멜로를 띄운 코코아의 달콤한 향에 이끌려, 아이들은 하나둘 집 안으로 들어왔다.

2층, 루카 방으로 올라온 친구 비토리오가 먼지 쌓인 까칠이를 발견했다.

"우와, 이게 네가 전에 말한 바이올린이야?"

"응... 그런데 지금은 안 써."

루카는 시들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 이거 칼처럼 생겼네!"

루벤이 활을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활이 공기를 가르며 '휘익' 소리를 냈다.

"내 칼을 받아라! 나는 정의의 기사다!"

다시 전쟁놀이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루카의 방은 어느새 전쟁터로 바뀌었다. 침대 위 이불은 성벽이 되고, 옷장은 든든한 요새가 되었다.

"그럼 나는 바이올린으로 방패를 만들어야지!"

비토리오는 까칠이를 거꾸로 뒤집었다. 둥근 뒤판이 방패로는 제격이었다.

"아니야! 이거는 대포야! 쾅쾅!"

까칠이는 때론 방패가 되기도 하고 군함이 되기도 했다. 칼이 되기도 하고 포탄이 되기도 했다. 아이들의 거친 손길이 닿을 때마다 까칠이는 무서워서 현을 더욱 바짝 조였다.

*제발... 그만해...*

전쟁터에 끌려나간 소년병처럼, 까칠이는 이리저리 휘둘렸다.


"아, 줄이 끊어졌네?"


비토리오가 끊어진 현을 보며 미안한 듯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안 써."


루카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루카는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구나...*

바이올린 안쪽 깊숙한 곳에 무거운 멍이 하나 더 생겼다.


# 4. 헐값에 팔린 꿈


중학생이 된 루카는 새로운 마음으로 방 정리를 시작했다. 붙박이장 한 구석에 먼지가 수북이 쌓인 까칠이가 눈에 들어왔다.


까칠이…
한때는 자랑스럽게 품에 안고 다니던 소중한 보물.
지금은 그저 낡은 물건일 뿐이었다.

"루카야, 이 바이올린은 어떻게 할래?"

"저는 그냥… 음악은 듣는 걸로 만족하려고요. 필요한 사람 있으면… 주셔도…"

루카는 말꼬리를 흐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엄마. 그 바이올린 팔아서 조립식 건축 모형 사 주시면 안 돼요?"

가슴이 먹먹해진 까칠이는 마지막으로 루카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루카...*


Via Musica(음악의 거리).

한때 크레모나 악기 거리의 중심이었던 이곳은, 이제는 상권이 옮겨가고 낡은 표지판만이 과거의 명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석양빛이 쇼윈도의 유리창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 루카의 어머니는 해진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오래된 돌길을 다시 걷고 있었다.

문 닫은 가게들 사이에서, 흐릿한 유리창 사이로 불빛이 흘러나오는 악기상 하나가 루카 어머니의 눈에 띄었다.

삐걱이는 문을 열고 들어선 가게 안에서는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벽면을 가득 채운 다양한 악기들 위로 백열등 하나가 마지막 숨을 쉬듯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석간신문을 보던 주인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바이올린을 한 번 훑어보더니 책상 위에 무심히 내려놓았다.

"음... 이 바이올린은 상태가 안 좋네요. 현도 끊어져 있고..."

까칠이는 주인의 냉담한 눈빛에 몸이 굳었다.

흥정할 기회도 없이 까칠이는 악기상 주인이 부르는 값에 팔렸다.
주인은 까칠이를 쇼윈도 한 구석에 기대 놓았다.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까칠이는 몸을 움츠렸다. 누군가 다가오면 더 깊은 그늘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주인을 만나 가게를 나서는 다른 악기들을 볼 때, 까칠이의 안쪽에서 자기도 모르게 슬픈 선율이 흘러나왔다.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밤이면, 까칠이는 아주 작은 진동을 만들어냈다. 바람소리보다도 조용한 위로였지만, 그 울림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까칠이는 점점 잊혀진 악기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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